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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새로 탄생한 스타는 가가인가 쿠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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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스타 이즈 본

3번째 리메이크된 ‘스타 탄생’

브래들리 쿠퍼의 감독 데뷔작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설정

CG 등 사용 않고 라이브 공연

뚜렷한 자기만의 방식 보여줘

레이디 가가 연기력도 인상적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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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이즈 본(A Star Is Born). 즉, 스타 탄생.

이 고풍스러운 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화의 첫 편이 등장한 것은 무려 81년 전인 1937년. <스타 이즈 본>은 이 첫 편을 시작으로, 1954년, 1976년, 그리고 이번 2018년 버전까지 할리우드에서만 벌써 세 번째 리메이크되고 있다(주디 갈런드와 제임스 메이슨이 주연했던 1954년 버전이 가장 훌륭하다만, 이번 버전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출연했던 1976년 버전의 리메이크다). 대체 어떤 이야기이기에 세 번씩이나?

줄거리인즉 이렇다.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뒤 우주의 중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스타가, 어느 날 우연히 돈도 배경도 엄청난 미모도 없는, 그러나 재능과 열정은 측량할 길 없는 무명을 만난다. 스타는 무명이 뿜는 광채를 곧바로 알아보고, 전심전력을 다해 그녀를 스타의 반열로 끌어올린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술과 마약과 하강의 상실감이 만든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예전의 스타는 이제 새로운 스타를 위해 길을 비켜줘야만 하는데, 이하 생략.

독창적 색채 있나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는 ① 여주인공의 신데렐라풍 성공담부터 ② 시스템으로부터 냉정하게 폐기처분되는 남주인공에 대한 연민 ③ 둘 사이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증폭되는 ‘순수한 사랑’의 선명도, 그리고 ④ 할리우드 또는 쇼비즈니스 세계의 자기비판(그것은 물론 데드풀의 마블판 까대기 정도의 펀치력이다만)과 ⑤ 스타의 일상생활과 화려한 무대의 백스테이지 실컷 구경하기 등등, 웬만한 것들은 다 갖추고 있다 하겠는데, 하지만 그렇다 하여 영화의 설득력이 자동 출력되는 것은 아닌 법. 2018년의 <스타 이즈 본>은 자신만의 색채와 설득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가.

한때 비욘세 주연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라는 조합까지 거론됐다고 하는 이번 리메이크의 핵심 이슈는 단연 여주인공 ‘앨리’ 역에 레이디 가가를 캐스팅했다는 것, 그리고 남주인공 ‘잭슨 메인’ 역을 맡은 브래들리 쿠퍼가 감독도 맡아 감독으로 데뷔했다는 것이다.

그 맨얼굴은 모를지라도 이름만큼은 모를 수 없는 ① 레이디 가가라는 거물 스타를 훌쩍 주연으로 올려놓은 캐스팅은, 관객들로부터 ‘무임승차’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76년 버전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역시 본업이 가수였지만, 그녀는 <스타 이즈 본> 출연 이전에 <퍼니 걸>(1968년)로 이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만큼 연기자로서 ‘검증 필’ 된 상태였다. 그러나 레이디 가가는 연기 경력이라고 해봐야…라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충분할 만큼 가가의 연기는 기준치 이상의 함량을 보여준다.

뭐, 일단 이 영화가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퍼포머로서의 역량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겠다. 오히려 몇만 관중 앞에서 난생처음, 그것도 공연장에 손님으로 단순 초대된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무대에 끌어올려진 완전 무명신인으로서는 너무 완벽한 공연을 보여준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겠다만. 특히나 모든 로맨스의 핵심이자 열쇠인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설득력을 확보하는 데 있어 뮤지션으로서의 그녀의 역량은 큰 힘을 발휘한다.

‘54년 버전의 남주인공’ 노먼 메인(제임스 메이슨)이 들른 선셋대로의 재즈클럽처럼, ‘잭슨 메인’이 훌쩍 들른 곳은 드래그 클럽. 그곳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라 비 앙 로즈’ 독창, 그리고 그 공연의 말미에서의 순간적 눈맞춤은 숨덩어리가 목구멍에 걸릴 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 뒤, 한밤의 마트 앞 주차장에 쭈그려 앉은 채 앨리가 자신의 즉흥곡을 잭슨에게 들려주는 대목이야말로 ‘단번에 꽂힌’ 둘의 사랑을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 주차장 장면은 두 사람의 사랑을 떠받치는 지반일 뿐 아니라, 후반 들어 본격 드러나는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납득시키는 데 있어서도 핵심이다. 왜냐하면 이번 2018년 버전에서는, 거물이 되어가는 여주인공에게 남주인공이 실망하는 이유를 그녀의 성공에 대한 질투 또는 열패감이 아닌, 둘이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매혹시켰던 ‘그녀다움’을 그녀가 점점 잃기 때문이라고 설정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잭슨 메인’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그의 추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지시키는 핵심이다. 이전의 남주인공들과는 달리, 2018년의 남주인공 잭슨은 추락의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를 영화 전체에 드리우지 않는다. 그는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에 짓눌린 실패자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쇼비즈니스 판의 소모품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그녀다움’을 단단히 지킬 것을 독려하는 대인배로서의 면모를 마지막까지 잃지 않는다.

이런 잭슨의 모습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때가 묻기 전 앨리의 ‘그녀다움’이 잭슨만큼이나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매혹적이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주차장 장면에서의 가가의 연기로 단단하게 확보된다. 그 장면에서 그녀가 끌어낸 것은, 우리가 <원스>의 악기점 피아노 연주 장면이나 <비긴 어게인>의 밤새워 음악 나눠 듣기 같은 장면들에서 보았던, 음악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이 공유되는 순간의 마술적 공명에 다름 아니다.

가만히 보면 이번 2018년 버전은 남주인공의 몰락을 여주인공의 성공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잭슨이 점점 청력을 잃어가는 설정을 추가한다든지, 중반까지 잭슨이 겪는 알코올-약물중독의 문제를 어느 정도의 선(취한 나머지 졸도하듯 잠들어버리는 정도) 이상으로 부각시키지 않는 등 말이다. 이는 영화 초반부터 남주인공의 중증 중독자로서의 자기파괴적 추태와 민폐를 확실하게 부각시키고 들어가는 이전 버전들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데, 덕분에 영화는 중반까지 신데렐라적 성공담의 산뜻한 색채를 유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2018년 버전은, 잭슨의 알코올중독과 자기파괴적 충동에 대한 알리바이로서 어두운 성장 배경을 추가하고 있는데, 이 역시도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는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잭슨의 친형이자 로드매니저인 ‘바비’(샘 엘리엇) 캐릭터다.

브래들리 쿠퍼가 처음부터 샘 엘리엇의 캐스팅을 염두에 두고, 보컬 코치까지 받아가며 자신의 목소리를 샘 엘리엇의 목소리와 비슷하도록 변조했을 만큼 샘 엘리엇이 연기하는 ‘바비’ 캐릭터는 중요한 축을 이루는데, 덕분에 영화는 스타들뿐 아니라 그 뒤의 ‘이름 없는 삶’들에 대한 위무로까지 나아간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2018년의 <스타 이즈 본>이 이토록 남주인공의 추락이 드리우는 그늘을 최대한 지우려 애쓴 것은, 어쩌면 현재의 관객들이 그 그늘을 버거워할 만큼 추락의 공포가 현실에도 만연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아무튼.

많은 해외 언론들에서도 말하고 있듯, 이번 <스타 이즈 본>을 통해 태어난 스타는 단연 ‘감독’ 브래들리 쿠퍼다. ‘딱히 독창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그의 말처럼, 이 영화는 영화미학의 신경지를 개척하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분명한 자기만의 방식이 있고 그것은 충분히 지지할 만하다.

아날로그적 미련함이 주는 깊이

단적인 예로 이 영화의 대형 공연장 장면을 보자. 이 장면들의 인파는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영화 속 공연 장면은 윌리 넬슨(잭슨의 밴드의 실제 프런트맨인 루커스 넬슨은 윌리 넬슨의 아들이다)의 실제 무대의 막간, 또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잘 아시다시피 그는 76년 판의 주연배우다)의 막간에서 실제 라이브로 연주됐다. ‘앨리’의 공연 청중들은 레이디 가가의 팬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공연들은 가가의 강력한 첫 제안대로 실제 공연 그대로 녹음되었다.

크건 작건 무대에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전문 뮤지션이 아닌 배우가, 이미 전설인 뮤지션들의 공연을 즐기고 있는 수만명의 음악 팬들 앞에서 야유받지 않을 만한 ‘그럴듯한’ 공연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가 아무리 대중 앞에 서는 것에 익숙한 할리우드 스타라 해도 말이다.

녹음된 음원에 립싱크-핑거싱크 대신, 훨씬 품이 많이 들고 위험부담 높은 방식을 택한 쿠퍼의 시도가 완성도에 몇 퍼센트나 기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비효율’로 구축된 세계는 빠르고 영리한 효율로 만들어낸 것보다 훨씬 깊고 탄탄해 보인다. 컴퓨터그래픽과 입체영상(3D)을 넘어, 가상현실(VR)의 고지 향한 돌진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움직임처럼 보이는 지금, 그 아날로그적 미련함은 의외로 선명하고 싱싱하다. 오래된 별에서 갓 태어난 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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