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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인구 130만, 스물일곱 살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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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독일에 있다가 일정을 앞당겨 귀국했다. 에스토니아 대통령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강연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무슨 정치인도 아닐뿐더러 독일 일정이 며칠 앞당겨도 될 만큼 여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규모가 큰 행사일 텐데 청중석에 나 한 사람이 더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 될 리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했다. 북구 발트해 해변의 한 작은 나라에 대한 나의 애정이 그만큼 깊다.

인구 130만에 나이가 아직 스물일곱인 나라(공식 독립 1991년). 그 나라를 처음 만난 건 그 나라 나이가 열 살 남짓이었을 때였다. 학회 초청장을 받았는데 스팸메일인 줄 알고 지울 뻔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었을뿐더러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서 그랬다. 그랬던 나라에 막상 가서 보니 놀라웠다. 중세의 독일 기사령, 한자동맹 도시의 오랜 전통이 선연한 해변 도시의 동화적인 풍경에다 '노래하는 혁명'이라 불리는 근년의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사도 놀라웠다. 무엇보다 어렵사리 독립을 쟁취해 이제 나라를 세우고 지켜가려는, 신생국 국민다운 민족적 열의가 참 아름답게 비쳤다.

학회가 열린 곳은 수도 탈린에서 버스로 3시간쯤 되는 대학 도시 타르투였는데 작은 학회 하나를 꾸리면서 온 세계로 촉각을 뻗어 다양한 전문가를 모아다가 따뜻하게 맞아주고 귀 기울여주고 대접하는 데서 나라를 세우고 세계로 펴나가려는 열의가 선연했다. 오랜 학문적 전통도 엿보였지만 자국어와 러시아어 정도가 통용될 줄 알았는데, 학회 동안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여러 유럽 언어가 통역 없이 자유롭게 쓰여 놀라웠다.

학회가 끝나고 얼마 뒤 우편물 하나를 받고 더욱 놀랐다. 스페인에서 온 학술지(debates)였는데 에스토니아에서 발표했던 내 논문이 스페인어로 번역돼 실려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니 강연을 잘 들었다며 번역도 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그사이 정말로 번역을 해서 스페인 학술지에다 수록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물론 에스토니아로부터도 자국 학술지가 왔다. 수록된 다채로운 언어의 논문들을 보며 작은 나라의 열의와 인력에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인상 깊어 조금 적어두었고, 그 기록은 나중에 나의 책 '시인의 집'의 첫 챕터, '발트해 연안의 부동산'이 되었다. 물론 부동산 취득 이야기일 리 없고, 그곳에 잠깐 있는 동안 경험한 정신적인 풍요로움의 이야기였다. 작년 봄에야 조금 틈이 나서 그 글을 독일어로 옮겨보았고, 옮긴 김에 작은 고마움의 표시로 에스토니아로도 부쳤다. 그랬더니 당장 또 초청이 와서 지난가을에 다시 다녀왔다. 역시 따뜻하고 좋은 학회였는데, 끝나고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옆자리 사람이 다정해서 내가 다시 온 사연을 잠깐 이야기하고 마침 여분이 하나 있던 그 독일어 번역도 건넸다. 그 자리에서 조금 읽어보는 것 같더니 잠깐 자리를 떴다가 조금 뒤에 돌아와서 이러는 것이었다. 그곳의 문화저널 쪽과 이미 이야기가 되었으니 자기가 에스토니아어로 번역을 좀 하겠다고. 놀라운 사람들이었다. 문화뿐만 아니라 스카이프며 비트코인 등 작은 나라가 주력해서 개발해가는 디지털 전략들도 눈여겨보게 되었다.

에스토니아 대통령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국민 교육을 어떻게 하느냐고. 그 밖에도 몇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시간이 없었고, 무엇보다 대통령 자신의 연설에서 답을 추론해볼 수 있었다. 대통령이 직접 맨 먼저 말한 것은 국민의 다언어 교육이었고, 다음은 그야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디지털 환경의 조성이었다. 유럽연합(EU)이나 유엔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도 언급되고 세계와의 네트워크 조성에 주력함을 누누이 강조했다. 작은 나라의 생존전략이었다.

그런 문맥에서 떠오르는 디지털 시큐리티 문제는 만국의 안건이라 어디서든 이야기될 수밖에 없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세계가 여전히, 아니 더욱 함께 지켜가야 할 물리적인 안전,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기술에 걸맞은 인격적 성숙이며 나라의 안전에 대한 생각도 새삼 다시 생각해보는 자리였다. 예컨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하루아침에 점령해버렸을 때 어렵사리 독립을 쟁취했던 발트해 연안 3국의 명운을 두고 나마저 마음을 졸였으니 말이다. 우리가 애써 구축하고 있는 디지털 세계야 더더욱 물거품 되기 좀 쉬운가.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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