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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경제포커스] '죽기 살기'라는 절박함이 배어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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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애물단지'였던 하이닉스, 반도체戰서 '죽을 각오'로 생존

정부도 고용 참사 막고 싶다면 필사적으로 규제 개혁 나서야

조선일보

이진석 논설위원


벽보에는 'SK하이닉스인(人)의 독한 행동'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반도체 전쟁 승리를 위한 패기(覇氣)의 실천 수칙'이라고 했다. 두 달 전 SK하이닉스의 경기도 이천 공장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대당 1000억원까지 한다는 반도체 제조 장비들이 들어찬 공장 복도 한가운데 붙여놓은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독한 행동'은 10가지였는데, 둘째가 '정해진 목표는 죽기 살기로 달성해낸다'였다. 죽을 각오로, 이걸 해내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절박감으로 목표를 달성하자고 했다. '죽기 살기로'라는 막무가내 촌스러운 표현에 느닷없이 콱 목이 메었다. '목숨을 걸고 일하는구나. 이런 각오로 살아남았구나.' 20년여 전 외환위기 시절 만들어진 하이닉스는 오랫동안 애물단지였다. 한때는 "하이닉스가 망해야 한국 경제가 산다"고 했다.

D램 메모리 반도체 세계 2위 기업인 SK하이닉스는 국내에 이천 말고도 충북 청주에도 공장이 있다. 그 공장을 이달 4일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했다. 2020년까지 협력업체를 합쳐 일자리 5000개를 만들 신규 공장 준공식이 열렸다. 취임 후 첫 국내 공장 준공식 참석이라 그것만 해도 뉴스였는데, 대통령의 발언이 이전과 달랐다. "(일자리 창출은)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 지원하는 것이고, 정부는 (기업들을) 지원하는 '서포트 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당연한 말인데 이 말을 듣기가 참 어려웠다. 대통령은 올 1월 "일자리는 민간이 만드는 것이고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건 고정관념"이라고 했다. "민간과 시장은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랫동안 실패해 왔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는 데 9개월이 걸렸다.

이 정부는 최저임금을 올려 소득 주도 성장 한다고 했고, 일자리도 정부가 세금 퍼부어 직접 만들겠다고 나섰다. 50조원 넘는 세금만 날리고 일자리는 만들지 못했다. 식당 이모와 편의점 알바, 40대 가장들까지 일자리를 잃고 고용 시장에서 밀려나는 고용 참사(慘事)가 벌어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분야의 탁월함이나 미덕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일을 직접 해보면 된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진짜 용기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고기잡이를 해봐야 어부의 훌륭함을 깨닫는다고 했다. 축구 경기를 보면서 실수한 선수를 비난하고 비웃지만, 조기 축구라도 나가보면 그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땀을 흘려야 되는지 5분도 지나기 전에 알 수 있다. 30만 개는 늘어나야 한다는 일자리가 그 100분의 1로 고꾸라지고서야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기업이고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된 모양이다. '죽기 살기'로 싸워서 기업이 성장해야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세상에 고용 없는 성장은 있어도, 성장 없는 고용은 없다.

서포터(지원) 역할도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도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 청주 공장을 둘러보던 대통령은 "(규제 개혁이) 필요하면 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 기업들이 거미줄 같은 규제에 묶여 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죽기 살기로 세계와 싸우는 기업들이 제발 풀어달라고 청와대와 정부에 제출한 규제 리스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서포터를 자임했으면 건건이 청와대에 읍소하고 머리 조아리길 기다릴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칼로 규제를 잘라내야 한다. 그렇게 규제 풀고, 노동 개혁 하고 턱없는 반(反)기업 정서도 막아야 한다. 시늉만 한다면 서포터가 아니라 훼방꾼일 뿐이다. 정부의 경제 정책을 보면 어슬렁거린다는 말이 떠오른다. '죽기 살기'라는 말에는 절실함이 배어 있다. 이 정부에 그럴 각오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진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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