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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는 연극 탄압의 여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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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역사' 낸 임석재 교수

"셰익스피어 때 영국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1세는 '연극 탄압의 여왕'이었습니다. 중세 때 난립했던 온갖 연극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연극을 도입하도록 길을 열어 줬지요. 그래서 셰익스피어 극장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겁니다."

새 연구서 '극장의 역사―건축과 연극의 사회문화사'(이화여대 출판문화원)를 낸 중견 건축사학자 임석재(57)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는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극장'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무대 디자인을 대단히 화려하게 꾸몄죠. 그 자신이 발레리노였고, 헤라클레스 역으로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힘을 가진 왕'이라는 걸 극장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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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 만난 임석재 교수는 “극장 건물은 예술이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만나는 곳”이라고 말했다. 아래 사진은 화려한 무대 건물이 돋보이는 로마 시 대의 히에라폴리스 극장(터키). /장련성 객원기자·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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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문학을 사랑한 '글쟁이 건축가'로 알려진 임 교수는 지금까지 50여 권의 저서를 냈지만 극장은 처음이다. "건축사의 표준 양식사를 썼던 것이 '버전 1'이었고, 생태·몸 이론 같은 인문사회적 주제와 융합한 것이 '버전 2'였습니다. 이제 건물 유형에 따라 연구하는 '버전 3'으로 넘어간 셈이지요."

여러 건축 중에서도 왜 극장일까. "극장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닙니다. 한 시대의 예술과 사회가 만나 접점을 이루는 물적 증거물이죠. 극장에서 안정적으로 공연을 한다는 것은 정치력의 기반이 된 동시에 예술과 문화의 틀이 탄탄히 잡혀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예술사'는 많았지만 '극장사' 연구는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건축과 무대 디자인, 연극, 사회문화사 같은 여러 장르를 융합해야 했다. 극장 건축이 어떻게 변화했나 살펴보다가 '이 지점에서 이런 사회적 의미가 있었겠구나'를 짚어냈다. 그는 건물의 의미를 생활체, 감성체, 정신체, 사회체로 보는데 "극장이야말로 '사회체' 성격이 강한 건물"이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서양 문명의 본질은 '형식주의'라고도 했다. "부정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 '멋있는 뭔가를 환상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그리스 유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천극장은 서양 극장의 원형인 동시에 '인공적 이상 세계의 완성'이라는 이 본질을 구현하는 작업이었다. 여기에 '자연과 함께한다'는 동양적 이상 세계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오면 '놀이'라는 요소가 추가되고, 로마 시대에 이르면 발달한 건축에 힘입어 극장이 '놀이 본능으로 융합한 제국의 용광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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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희극 가면. /임석재 교수

중세에는 세속극이 억압됐지만 실내 극장의 전통이 자리 잡았다. 고전이 부활한 르네상스기에는 '영구적 실내 극장'이 생겨 인공적 이상 세계가 실내에서 구현됐다. "바로크 시대에 오면 오페라 극장이 생겨납니다. 근현대에는 19세기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 20세기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처럼 극장이 독립 작품이 되지요."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새로운 상식도 많이 얻게 된다. '오케스트라'는 원래 그리스 원형극장의 무대였는데 훗날 악단이 앉는 자리가 됐고 지금은 관현악단 자체를 뜻하게 됐다. 오늘날 대저택을 말하는 '맨션'은 중세에는 실내 극장의 무대용 가건물을 지칭했다.

임 교수는 "지금 우리나라는 건물을 보는 시각이 부동산이나 기술 쪽으로만 쏠려 있는데, 건축의 사회적 파급력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극장은 어쩌다 한 번 가는 곳이라고요? 세종문화회관을 생각해 보세요. 서울 한복판에 저만 한 건축물, 저만 한 문화 공간이 없었더라면 광화문 일대 도심 공간의 성격은 지금보다 크게 삭막했을 겁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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