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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강릉 바우길 제1코스 - 선자령(仙子嶺) 풍차길을 걷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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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온전히 마음이 가라앉고 부지불식간에 내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 길 위에서 '나'를 만나다

무심히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온전히 마음이 가라앉고 부지불식간에 내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내 안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절대고독과 침묵의 공간이 내어주는 뜻밖의 선물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무겁다. 내 안의 내가 대뜸 건네는 말의 대부분은 회한과 자책에 비롯된 꾸지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울지(?) 몰라도, 그 존재를 바라보는 스스로는 지극히 무겁고 또 냉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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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을까? 왜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자성의 목소리는 저 먼 산맥을 넘어오는 바람에 실려 또 다른 내 안으로 훅~ 몰아친다. 변명조차 허락하지 않는 지엄한 추궁 앞에서 발걸음은 멈춰지고 고개는 저절로 떨구어지기 마련이다. 부족했구나. 잘못했구나. 어슴푸레하게 짐작만 하던 실수와 과오가 자신 안의 부끄러움과 만나게 되는 그 지점에 닿은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삶이라는 긴 여행의 중간 중간 욕심과 아집, 비루함, 어리석음으로 스스로 흩어놓았고, 또 흘려보냈던 흔적들이, 그 삶의 배설물들이 곤두선 채로 달려든다. 그들의 기세는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고, 그랬기에 칼에 베인 상처는 의외로 깊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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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간에 홀로 존재하는 어느 길 위에서, 어느 숲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스스로의 민낯과 만나고, 민낯에 드리워진 삶의 때와 얼룩에 부끄러워지고, 그래서 겸허해진다. 건듯 불어오는 잔바람에도 소름이 돋고, 자책은 감겨진 눈 저 안쪽에서부터 스미듯 밀려나온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눈이 뜨이고, 매섭게 후려치던 바람도 보드랍게 어깨를 토닥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득히 펼쳐진 수억 년의 격동을 살아낸 산맥의 첩첩의 너울들도 그 길이 어느 길이든 그냥 가보는 것이라고, 그 방향조차도 아무려면 어떠냐고... 가보지 않은 길을 가다보면 으레 실수도 있는 법이라고 위로를 한다. 다 그런 것이라고... 다만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라는 당부도 빼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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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길 위에서는, 산에서는 성찰이란 이름으로 스스로와 만나고, 정화(淨化)되는 한 인간과 만날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그렇다.

하지만 아쉽게도 산에서의 깨달음이 세상으로 내려올 때, 반에 반으로 덜어지는 또 다른 부족한 나와 만나게 됨은 아쉽고도 또 아쉬운 일이다. 다만 반에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이지만, 그나마도 얻은 게 있으니 다행 아니냐고 자위를 해도 괜찮을런지... 각자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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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령의 숲 이야기

선자령에 바람이 분다. 동해의 바다를 건너온 갯내음을 담뿍 담은 바람이 분다. 풀잎들이 눕고,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전달되는 숲의 변주는 요란하다.

바람은 고요의 연못에 떨궈진 나뭇잎마냥 잔잔한 파문으로 번져나는 명상 음악으로 왔다가, 어느 틈엔가는 둥글게 둥글게 맴을 도는 왈츠로, 더러는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하는 교향악으로 치닫는다. 산이 높아질수록 바람의 박자 또한 빨라진다. 선자령은 '바람의 언덕'이었던 것이다.

언덕을 지난 길은 다시 숲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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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조차 미치지 못하는 숲길은 한 사람 정도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으로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지기를 반복한다. 무심코 발걸음을 서두르는 찰나에, 길 위로 검은 열매가 흩어져 있다. 오디다. 길 양편으로 산뽕나무 두 그루가 서로를 마주보며 오래 된 연인들의 애틋한 마음마냥 그렇게 마주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계절은 저만치 가고 있는데 때를 잊은 오디들이 더러는 길 위에서 행인들의 발길에 채이고, 또 더러는 아직도 가지에 매달려 계절을 거역하고 있었다. 무슨 아쉬움이 남아 아직도 가지 끝을 떠나지 못하고 메말라 가고 있더란 말인가. 그나마 멀쩡한 놈을 따서 맛을 보니 생각 외로 달다. 두어 개를 더 따서 입에 넣고는 아쉬운 듯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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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령 가는 길에는 산뽕나무 말고도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행인을 맞는다. 머리를 땅 속에 박고 힘겹게 물구나무를 선 듯한 모습의 나무도 있고, 열 갈래가 넘게 촘촘히 들어차 마치 한 그루처럼 떼를 이루며 자라는 단풍나무도 있다. 저마다 스스로 선택하여 살아가는 모습이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선자령길이 주는 묘미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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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어지는 숲길. 묵묵히 걷는다. 서두를 이유도 필요도 없이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그저 나아갈 뿐이다. 길은 이따금씩 숲을 벗어나 평지로 나갔다가 다시 숲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하늘은 높고 청정하다. 구름이 드문드문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경계의 허전한 여백을 채우고 있지만 그마저도 푸른 하늘이라는 작품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어느새 계절은 푹푹 찌는 날씨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가을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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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언덕에서 세상을 노래하다

산 정상이 가까워지자, 바람의 언덕은 기어이 바람을 제대로 풀어 놓는다. 실제 선자령은 먼 바다에서부터 출발한 바람이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넘는 통로인지라, 사시사철 바람이 그칠 날이 없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선자령 정상 부근에는 키 큰 나무들이 없다. 계절에 따라 방향만 달리한 바람이 항상 거센 탓이다. 그러니 그나마 키 작은 관목들만이 땅에 뿌리를 박은 채 온몸으로 견디고 있을 뿐이다.

숲을 벗어난 길은 평원으로 이어진다. 산 정상이 머지않은 1,000m가 넘는 고지대에 이런 대평원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새삼스레 이곳이 대관령 목장의 지척임을 깨닫는다. 저 멀리에서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는 풍력발전기들이 딛고 선 땅이 바로 양과 젖소들이 풀을 뜯던 그 초지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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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령은 엄연히 산봉우리이지만 봉(峰)이 아니고 령(嶺)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렇게 순한 지형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선자령을 '바람의 언덕'이라고 하나보다. 바람의 언덕은 풍력발전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최고의 터전이다.

선자령의 바람은 풍력발전기의 날개 위에 앉아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 부드럽지만 강하고, 건들건들하지만 끈기 있는 근성으로 풍력발전기에 질기게 엉겨 붙어 기어이 에너지로의 변환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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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바람은 바람(?)인지라 연애의 고수답게 밀당도 프로급이다. 바람의 속삭임에 풀이 가만히 드러눕듯, 그렇게 바람의 추파는 풍력발전기의 그 육중한 몸마저 스르륵 풀어버린 것이다. 풍력발전기는 말 잘 듣는(?) 애인마냥 바람에게 몸을 내맡긴 채로 그렇게 맴을 돌고 또 돈다. 온 산을 가득 메운 50여 기에 이르는 풍력발전기는 언제부터인가 선자령의 순한 양이다.

그렇게 풍력발전기와 어우러진 바람은 에너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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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령은 발전소다

선자령에 대규모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서게 된 이유는 선자령을 포함하는 대관령 일대에는 일 년 내내 초속 6.7m(풍력발전은 초속 3m부터 가동 가능하다고 한다)의 서남풍(西南風)이 꾸준히 불어오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느리지만 부지런한 50여 기의 풍력발전기가 생산해내는 발전 용량은 풍력 발전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소양강 다목적댐 발전량의 절반에 해당된다고 한다. 선자령이 지척인 강릉시 가구 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5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이라고 하니, 딴에는 그 역할이 결코 가볍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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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곳은 양과 젖소목장으로 유명한 삼양축산 대관령목장의 1,000여만 평의 초지 위에 세워져 있는 터라 나무를 자르고 산을 깎는 등의 자연훼손 없이 풍력발전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마저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양과 젖소들이 떠난 자리를 풍차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차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높이는 60m에 이르고, 날개(Rotor Blade)의 길이는 80m에 달하는 그 규모가 가히 압도적이다. 멀리에서 보던 목가적인 바람개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발전소로서의 규모만이 도드라진다. 게다가 신음하는 야수의 깊고도 묵직한 울부짖음은 음울하고도 질겨 산야를 움츠러들게 한다. 막연한 서정적인 풍경 뒤에 숨겨진 개발의 속살이자 이면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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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라!

아직도 선자령 정상까지는 1km 남짓...

문득 멈춰 뒤돌아본 산들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어느 즈음을 지나 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산들의 파노라마... 남쪽의 바다까지 쉼 없이 달려가는 백두대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그중 어느 작은 등줄기 하나를 타고 왔으리라.

그렇게 우두커니 지나온 길 위에서 스스로는 돌아보아지고, 웅대한 자연 앞에서 더없이 왜소하고 나약한 한 인간의 진면목과 만나게 된다.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니었던 일에 아웅다웅하고, 조금 더 큰 몫을 차지하겠다고 세상과 나를 기망하고 살았던 자신이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벗어 던져버려야 할 허물은 늘려 있었고, 세상 속에서 흩뿌려 놓은 수많은 업(業)들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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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백두대간 선자령'. 1,157m의 꼭대기에 다다랐다.

선자령 정상에 올라 보면, 선자령과 바람은 필생의 동지이면서 앙숙임에 틀림이 없다. 선자령은 바람으로 이름을 얻었으나, 바람은 선자령 정상의 수풀과 아름다운 풍광을 앗아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선자령에는 매서운 바람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바위 몇 개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헛헛한 정상이다. 정상의 표지석만이 이곳이 가장 높은 봉우리임을 증명한다.

선자령의 동쪽으로는 동해바다의 장쾌한 풍광이 펼쳐지고, 남쪽 능선을 따라서는 저 멀리 발왕산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계방산과 오대산이 그 거대한 산세를 온전히 드러내 놓는다. 북쪽과 남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아름다운 능선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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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방인>의 작가인 까뮈가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장 그르니에의 대표 저작인 <섬>의 서문에 쓴 글을 떠올린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 흉내 낼 수 없는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기는 하나 곧 스러질 수밖에 없으며 그리고 또한 절망적으로 그 모습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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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생로병사야 세상 만물의 공통된 처지가 아니겠는가. 생명이 있는 것들이야 더할 나위 없을테고, 생명 없는 바위 하나마저도 바람에 깎이고 패여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스러지는 것은 생명 있는, 특히 우리네 인간 자신이며, 그렇기에 절망적으로든 희망적으로든 더불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항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 하지만 세상의 중심인 나는, 인간은 유한하다. 그 사실이 비록 절망적이지만, 그렇게 절망적이기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타자(他者)로서의 나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노래했던 윤동주 시인의 그 마음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이다. 가없이 펼쳐진 산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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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산(下山)하는 길

이제는 내려가야 한다.

정상을 벗어난 길은 이내 숲속으로 이어진다. 내려가는 길이라 조금은 가파르다. 하산하는 길 가장자리에 선 나무들은 행인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느라 겉 표면이 반질반질하다. 손때가 묻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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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선 저 멀리에는 조금 전에 만났던 풍차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이제는 작별을 고하여야 한다. 언젠가 선자령에 하얗게 눈이 쌓이는 날, 다시 만나는 그날을 기약해 본다.

돌아가는 길은 계곡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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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길에도 야생화가 도보여행자를 맞는다. 꿀풀이며, 개망초, 쥐오줌풀, 초롱꽃, 기린초, 참조팝나무까지 길을 밝히느라 여념이 없다. 길을 걷는 이와 더불어 그들도 길의 주인임을 주장이라도 하는 듯 만발하였다. 어쩌면 무료할 수도 있는 길이 다시 이야기를 담은 그릇이 된다.

올라갈 때의 감흥을 내려가는 길에서 찾기는 힘들다. 정상을 밟고 난 다음의 후유증일지도 모르겠으나, 어떤 의미에서의 무기력증 같은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정상을 향하던 열정이나 정상에서의 환희와 성취감이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긴장감은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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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 우리 스스로가 정상이라는, 또 어쩌면 위로 치달으며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쟁이라는 이름의 그 강박 말이다.

사실 스스로 이곳에 있는 이유는 걷는다는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를 가져본 적도 없었지만, 올라갈 때의 그 의욕 넘치고 활기차던 발걸음이 내려가는 지금에는 무겁고, 건조하다는 것은 무언가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물론 체력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또 우리는 과정을 즐기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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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그 길에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풍경들이며,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것인가. 삶의 의미는 큰 의미의 성취나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얻어지는 소소한 즐거움들 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유한한 삶의 마지막을 생각해 본다면 정답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자, 길과 나란히 잇닿아 흐르는 계곡의 청아한 물소리가, 이제야 맑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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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굽이의 길을 지나자, 오늘 여정의 끝이 보인다. 그렇게 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살아내야 할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잠시 내려놓고 왔던 그 삶이...

더불어 세상의 밖으로 뚫고 나가 다른 세상으로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길도 결국은 출발선의 그 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그렇게 짧지만 풍족했던 휴식의 시간은 결국 산 아래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혹여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애썼던 모든 노력들은 결국 돌아오기 위한 연습이었음을... 이제는 인정하여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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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령 가는 방법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영동고속도로 횡계 톨게이트 출구에서 우회전 900m → 삼거리에서 좌회전 → 구(舊)영동고속도로 5km 진행 → 대관령휴게소

<대중교통의 경우>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횡계 가는 버스

▶ [라이프] 강릉 바우길 제1코스 - 선자령(仙子嶺) 풍차길을 걷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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