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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어르신, 운전졸업 하셔야죠” VS “늙었다고 운전도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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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사회 한국 "운전도 졸업해야" 목소리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 5년 새 75.6% 증가
"늙으면 운전도 못 하나" 반발도

지난 18일 오후 2시 14분쯤 서울 구로구 개봉동 도로를 달리던 아반떼XD가 갑자기 약국을 향해 돌진했다. 운전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다만 고령이었다. 운전자 김모(83)씨는 경찰조사에서 "주차장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고로 약국을 찾은 손님 한 명이 유리 파편에 머리를 맞아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처럼 고령운전자 교통사고가 잇따르면서 ‘운전에도 졸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운전하기가 버거울 나이가 되면 사고 위험이 커지는 만큼 운전자가 스스로 면허를 반납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되고 있다.

반면, 노인 인구가 매년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지 노인이라는 이유로 운전을 하지 말라는 건 부당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비중이 14%를 넘어서면서 ‘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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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서 80대 운전자 김모씨의 아반떼XD가 약국을 들이받았다. /구로소방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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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운전자 교통사고 급증…"운전도 졸업하자" 목소리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는 도로교통공단이 주최한 ‘면허증 반납’ 행사가 열렸다. 고령 운전자 스스로 ‘운전 졸업’을 선택, 면허증을 반납하는 실제 사례를 제시한 것이다. 공단은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의 경우 신체 기능과 인지 능력을 고려해 운전 능력이 떨어지면 스스로 면허를 반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3691명이 면허증을 자진 반납했다

이날 행사에서 면허 반납자로 나선 택시기사 최홍운(80)씨는 "이 나이에 운전하는 것은 욕심이다. 대중교통만 타겠다"며 "지금도 웬만한 초보운전자보다 훨씬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고령운전은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행사장을 찾은 김영석(80)씨도 "나이가 들수록 순발력이 떨어지고 교통 상황에 집중하기 어렵다"며 "나는 65세부터 운전을 안 했는데, 나이 들면 (운전)하지 말아야지"라고 말했다.

공단이 이 행사를 개최한 것은, 노인 인구가 매년 늘어나면서 고령 운전자에 의한 사고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단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수는 2012년 165만 8000여 명에서 2017년 279만 7409명으로 68.7% 증가했다. 고령운전자 교통사고는 2012년 1만 5190건이었다가, 지난해 2만 6713건으로 5년 사이 75.6%나 늘었다.

고령운전자는 다른 연령대보다 사고 빈도가 높다. 지난해 전체 운전면허 소지자 1000명당 6.8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는데,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는 1000명당 9.5건 사고가 발생했다. 교통사고 발생 시 사망 위험도 크다. 지난해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 치사율(100건당 사망자 수)은 3.2%로 전체 연령대 치사율(1.9%)보다 두 배가량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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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왼쪽부터)윤종기 도로교통공단 이사장, 고령 운전자 최홍운씨, 임호선 경찰청 차장이 면허증 자진반납 퍼포먼스 팻말을 들고 있다. /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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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도로교통공단 서울지부 교수는 "뉴질랜드는 운전자가 80세가 되면 자동으로 면허를 말소하고 2년마다 재시험을 치르도록 한다"면서 "안전을 고려해 (운전 면허 반납에 대한) 의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직 팔팔한데… 노인은 운전도 못 하느냐"
하지만 14%가 넘는 고령자를 중심으로 "고령 사회에서 노인더러 운전 졸업을 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는 목소리도 크다. 특히 운전대를 잡는 것이 생업(生業)인 고령자들은 "굶어 죽으란 소리냐"고 반발하고 있다.

1톤(t)트럭을 모는 개인사업자 김영일(74)씨는 면허증을 반납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는 1966년 면허를 발급받은 이래, 50여 년 운전한 ‘베테랑’ 운전자다. "노인이라도 사람에 따라 (젊은 사람보다) 운전을 더 잘합니다. ‘사고 낼 것 같다’며 면허증을 반납하라는 시선이 불편합니다. 초보운전자나 휴대전화를 보면서 운전하는 염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도로에서 더 위험한 것 아닌가요?" 김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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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 17년차 김영한(64)씨는 "나이 들었다고 운전대를 놓으라고 하면 당장 밥벌이가 끊기고 생계도 위협받는다"면서 "이 나이에 다른 곳에 취업할 곳도 없는데 늙었다고 무작정 운전대를 놓으라고 강요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령자 운전을 제재하는 것보다는, 더 엄격한 건강 기준을 두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이호근 대덕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고령 운전자 건강에 이상이 있다면 공단이 ‘면허 정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면서 "이를 위해 우선 공단이 국민건강보험공단 측과 건강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에 이상 있는 고령자의 운전면허는 강제로 제한하고, 건강이 입증되는 고령자는 운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선 1998년부터 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고령자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운전면허 자진 반납자들에게 택시요금이나 전동휠체어·보청기 등을 할인해주는 식이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34만 5000명이 면허증을 반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령자가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할 경우 혜택을 주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일부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1년 넘게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다만, 부산시에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면허 반납 운전자에게 상업시설 요금할인 혜택을 주고 있다.

[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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