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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안시성’ 갑옷은 왜 고구려 고분 벽화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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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늘 민감하게 제기되는 것이 ‘고증’ 문제다.

19일 개봉해 줄곧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안시성’도 마찬가지다. 개봉 전부터 역사 마니아들로부터 각종 지적을 받아왔다. 안시성 군사들의 전투 복장이 당시 고구려 장수 복식과 너무 동떨어졌다는 것, 양만춘의 여동생이 이끄는 여군부대의 존재 등이다.

이에 제작진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철저히 고증했고,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 부분 역시 최대한 기록에 근거한 것”이라고 밝혔다. 위대한 전투의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설명이다. 김광식 감독을 만나 영화 ’안시성’ 고증에 대한 생각과 그 밖의 의문점에 대한 답을 들어봤다.

Q. 안시성 병사들의 갑옷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장수들과 왜 다른가?

A.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무사라 하면 철갑기병대인 ‘개마무사’를 떠올린다. 하지만 안시성에는 개마무사가 없었다. 연개소문의 중앙정부 군대가 운영했던 개마무사였지만 전체의 10% 정도였고 국경을 지키는 변방의 성에는 개마무사가 상시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활을 쏘고 말을 타는 병종으로 구성돼 있었다. 또 당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가 아니었고 평양성과 안시성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앙정부에서 같은 모양의 갑옷을 제작해 변방까지 일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알아서 만들어 입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같은 국가라도 각 성은 각자의 특성을 유지했을 거로 보인다. 그래서 안시성에 개성을 주려고 했다. 전투 복장도 자유롭고, 성주와 병사들과 성민들의 관계도 소탈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Q. 전투에 나선 장수들이 왜 투구를 쓰지 않나?

A. 당시에도 병종에 따라 투구를 쓰는 부대가 있고 쓰지 않는 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개마무사는 투구와 갑옷을 갖춰 입었지만, 환도수는 갑옷은 입고 투구는 쓰지 않았다. 부월수는 갑옷도 투구도 착용하지 않았고, 경기병들도 갑옷을 입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전투 복장과 마찬가지로 투구를 쓰는 것도 자유롭게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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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갑옷의 디자인이 너무 현대적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A. 고증은 물론 중요하지만, 영화의 목적이 고증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역사극을 만들면서 철저하게 옛날 방식으로 디자인된 옷을 입는다면 현대인들의 눈에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이상한 옷을 입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특징을 살려 디자인했다. 당나라군 168벌, 고구려군 248벌 총 416벌의 갑옷을 만들었다. 중국의 유명 갑옷 제작업체를 통해 대규모로 제작했다.

Q. 영화 속 백하부대와 같은 여군부대가 있었나?

A. 한국 역사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중국 쪽에 남아 있는 비석 등을 통해 연개소문의 여동생 연수영의 존재와 그가 수군 대장으로 활약했다는 기록이 확인된 바 있다. 고구려는 여성의 권위와 사회적 지위가 남성과 거의 동등했다고 한다. 양만춘은 형제 유무는커녕 생몰년조차도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연수영에서 착안해 그에게 여동생이 있고, 용맹한 여군부대를 이끌었다는 영화적 설정을 넣었다. 남녀가 다르지 않았던 고구려의 기상을 표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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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안시성의 모습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A. 기록에 따르면 안시성은 산새가 험하고 요새처럼 생겼다고 나와 있다. 현재 안시성으로 추청되는 중국 랴오닝성 영성자산성에 방문했는데, 민둥산만 군데군데 보이는 거의 평지였다. 그곳이 안시성이라면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일 가능성이 없어 보였고, 이세민과 상대해서 이긴 곳이라고 관객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주몽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오녀산성에 가봤다. 돌산이면서 가운데는 분지로 이뤄져 있다. 그의 아들 유리왕이 도읍으로 삼았던 환도산성에도 가봤는데 환도산성은 두 팔을 안으로 굽힌 형세를 하고 있다. 그 두 산성을 합쳐 영화 속 안시성을 디자인했다. 성곽 모양은 환도산성, 뒤로 펼쳐진 돌산은 오녀산성과 닮았다. 방어용이지만 위엄이 느껴지게 했다. 삼국유사에는 환도산성을 안시성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Q. 토산을 고구려군이 무너뜨렸다는 설정은?

A. 안시성 전투에 대한 기록 중 이세민이 안시성을 여러 번 공략했다는 이야기만 나오고 어떻게 공략했다는 내용은 없다. 유일하게 토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한쪽 귀퉁이가 무너졌고 고구려 특공대가 점령했다는 이야기다. 믿기지 않았다. 토산이 왜 무너졌는지, 무너진 뒤 고구려군이 어떻게 점령하게 된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상상했다. 고구려가 토산을 무너뜨리고 그에 대비하고 있다가 점령한 것으로. 이왕이면 고구려군을 주체적으로, 또 성민들이 힘을 합쳐 이뤄낸 것으로 그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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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양만춘은 왜 조인성이어야 했나?

A. 양만춘은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 성질’했을 것이다. 그의 거칠고 독립적인 면과 나잇대를 생각했을 때 양만춘 캐릭터에 어울리는 사람이 조인성이라고 생각했다. 할 말 다 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지 않나. 처음 시나리오를 썼을 땐 양만춘의 고뇌가 더 많이 담겨있었다. 홀로 고민하고 신에게 기도하는 그런 성주였다. 그런데 조인성을 만나고 보니 그런 캐릭터와는 맞지 않더라. 거절하길래 시나리오를 그의 성격에 맞게 수정해서 다시 내밀었다. 하겠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 고칠 생각이었다. 확신이 있었다.

Q. 영화 ‘안시성’의 의미는?

A. 당나라와의 전투를 영화에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에 또 하나의 증거를 남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도 이 영화는 우리 시대가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남을 것이다. 영화를 준비하며 영성자산성, 오녀산성, 환도산성 등에 가봤지만,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 역사에 관심 없더라. 주민들은 그게 산성이었는지도 모르고 성벽을 이룬 돌을 가져다 자기 집 담장으로 쓰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 ‘안시성’은 그렇게 방치된 우리 역사에 확실하게 깃발을 꽂은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24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안시성’은 전날 하루 관객 48만명을 동원해 누적 관객수 140만명을 기록했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 사진=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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