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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피의 정치학: 누구나 안전하게 생리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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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정부는 9월 가을학기부터 520만파운드(약 74억원)의 예산을 들여 전국에 있는 모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생리용품을 배치하고 있다. 생리대 살 돈이 없어 학생들이 학교를 빠져야 하는 이른바 ‘생리 빈곤’을 뿌리뽑기 위해서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3000달러(약 4800만원)를 넘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여성 5명 중 1명은 생리대 구입에 어려움을 겪는 ‘생리 빈곤층’이다.

학교뿐만이 아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모든 공공시설에 생리용품을 비치하는 것을 법적 의무로 규정하는 법안까지 논의 중이다. 법안을 발의한 모니카 레넌 하원의원은 “생리용품에 대한 접근은 소득에 상관없는 권리”라며 “누구도 생리용품에 접근하지 못해 모욕을 겪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최근 각국에서는 여성의 생리를 기본권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힘을 얻고 있다. 일부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을 넘어 보편 복지의 차원에서 생리대 접근성을 높이려는 정부 차원의 움직임도 잇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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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영 스콧(Young Scot)이 최근 스코틀랜드 학생 2000명 이상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4명 중 1명이 매달 생리용품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생리 빈곤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영 스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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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게 더 가혹한 생리

생리는 모든 여성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 돈이 많든 적든 예외는 없다. 그러나 매달 1~2만원의 생리용품 구입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경험의 양태는 크게 달라진다. 누군가는 출혈량에 따라 소형, 중형, 대형, 오버나이트 생리대까지 다양하게 갖춰 둘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생리혈이 흘러 옷에 묻을 정도까지 꾹 참다가 생리대를 교체한다. 피부가 짓물리는 아픔은 물론, 심한 경우 생리때문에 학교나 직장을 빠져야 하는 상황까지 견뎌야 한다.

스코틀랜드 시민단체 ‘여성 독립’이 지난 2월 여성 1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생리 빈곤이 일부 저소득층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숫자로 보여준다. 응답자 5명 중 1명은 재정적인 이유로 생리용품 구입에 어려움을 겪는 생리 빈곤층이었고, 10명 중 1명은 생리용품을 살 돈으로 먹거리를 사야했던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은 대부분 공중화장실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로 생리대를 대체했다. 헝겊, 티셔츠, 양말은 물론, 신문지를 사용했다는 응답자도 있었다.

생리 빈곤은 여성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응답자의 22%는 원하는 만큼 생리대를 교체할 수 없었다고 답했고, 그중 11%는 요도 감염이나 질염을 앓은 적이 있었다. 생리 용품을 구하지 못해 학교나 직장을 빠지는 등의 ‘사회적 고립’을 경험한 경우도 흔했다. 매달 찾아오는 생리는 여성들이 안정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경제 활동을 하는데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한다.



Source: How Do Homeless Women Cope With Their Periods? | NSFWomen by bustle



더 극단적인 사례도 있다. 미국의 온라인매체 ‘버슬’은 2016년 “여성 노숙인이 생리에 대응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대표적인 생리 빈곤층인 여성 노숙인의 삶을 조명했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와 8년째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는 카일라 윌컷(27)은 노숙 생활의 가장 힘든 점 중 하나로 생리를 꼽았다. “바지에 얼룩이 묻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옷이라곤 지금 입고 있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공중화장실에서 반쯤 벗은 채로, 피를 흘리면서, 옷을 빨곤 한다.” 작게 조각낸 생리대를 헌 양말로 감싸 ‘자체 제작’ 탐폰을 만들기도 한다. 생리용품에 부족해 만들어낸 고육책이지만, 깨끗하지 않은 헝겊을 사용하다 큰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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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영국 정부에 생리빈곤 대책으로 위생용품 무상지급을 요구하는 집회 참가자의 모습. 출처 Freeperiod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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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대가 전부가 아니다

생리 경험의 불평등은 국가와 국가 간에도 존재한다. 줄리타 오나반조 유엔인구기금(UNPFA) 동남아프리카 지역담당자는 “생리용품에 대한 접근은 그저 요인 중 하나”라며 “생리할 권리는 깨끗한 물과 생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 의료 지원 등이 종합적으로 갖춰질 때만 달성될 수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개발도상국일수록 이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케냐가 대표적인 예다. 우후루 케냐타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각 주는 학교에 등록된 모든 여학생들에게 충분한 양의 품질 좋은 생리대를 무료로 보급해야 한다”는 교육법 개정안에 서명했다. 여자 고등학생들이 생리때문에 4년간 평균 156일을 결석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이는 아프리카는 물론 세계 각국과 비교해도 선도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정책의 효과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영국 가디언이 인용한 시민단체 ‘자나아프리카’의 조사에 따르면, 농촌지역 학교에서 생리 용품을 교체할 수 있는 개별 공간이 확보된 곳은 32%뿐이었다. 만성적인 가뭄 탓에 흐르는 물이 나오지 않는 학교도 많았다. 더 큰 문제는 생리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 때문에 부모나 선생님들조차 생리에 대한 언급을 꺼린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은 가정이나 학교가 아닌 또래 친구들로부터 생리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그중에는 “생리 중에 성관계를 할 때만 임신이 가능하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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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예술가 루피 카우어는 지난해 생리에 관한 금기를 깨기 위해 생리혈이 묻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지만 두 번이나 삭제당했다. 인스타그램 측은 사진이 ‘우연히’ 내려졌다고 주장하며 사과했다. 루피 카우어 인스타그램.


■생리는 정치의 문제

여성은 평생 3000일 동안 생리를 한다. 햇수로 환산하면 8년이 넘는 시간이다. 먹고 마시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여성의 생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다. 요통과 냄새, 불쾌감이라는 ‘생리의 진실’은 생리대 광고에서조차 흰 바지 차림 여성 모델의 활기찬 미소로, 보송한 생리대 위로 쏟아지는 파란색 액체로 미화되어 표현된다.

그러나 최근 생리라는 주제를 공론장 위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이제 생리 빈곤이나 독성 생리용품 해결이라는 ‘정치적 투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영국의 뮤지션 키란 간디는 2015년 생리대나 탐폰을 착용하지 않고 런던 마라톤에 참가해 화제가 됐다. 미국의 예술가 루피 카우어는 바지에 생리혈이 묻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두 번이나 삭제당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한 여성 하원의원이 생리 빈곤 문제를 공론화하고자 스스로 생리 중임을 밝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생리에 대한 침묵에 균열을 내려는 이들의 시도는 곧 전세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여성의 ‘생리권’을 주장하는 공공 운동으로 발전했다. 2016년 7월 한국에서 열린 #생리대를 붙이자 캠페인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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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3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붉은색으로 칠한 생리대를 붙이며 생리에 대한 인식 개선을 요구하는 #생리대를 붙이자 캠페인이 열렸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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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연대는 실제 성과로도 이어지고 있다. 생리용품에 매겨진 세금, 일명 ‘탐폰세’ 폐지가 대표적이다. 인도 정부는 지난 7월 생리대에 부과됐던 12%의 재화및서비스세(GST)를 폐지했다. 지난해 7월 “생리대는 사치품 범주에 포함된다”며 과세 결정이 내려진 후, 시민 40만명이 대대적인 청원운동을 벌인 결과였다. 그에 앞서 2015년에는 캐나다가 생리용품 면세를 결정했다.

미국에서는 지난 2년간 뉴욕, 일리노이, 플로리다, 코네티컷주에서 탐폰세 폐지를 결정했다. 물론 미국 전체로 보면 탐폰세를 유지하는 주(36곳)가 대다수지만, 비아그라, 발모제조차 생활필수품으로 분류돼 면세인 상황에서 “왜 생리대만 예외냐”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투쟁은 ‘탐폰세 폐지’에 그치지 않는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전세계적으로 “생리 형평성(menstrual equity)” 개념이 공론장에서 힘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피할 수도 참을 수도 없는 생리라면, 인권의 측면에서 모든 여성에 ‘안전하고 자유롭게 생리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국 뉴욕주에서는 이러한 “생리 형평성”개념에 근거, 공립학교, 노숙자 쉼터, 교도소 등 공공시설에 무료 생리대를 비치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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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인도 콜카타에서 열린 생리대 면세 시위에 참여한 인도 학생들. 출처 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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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는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사실 한국은 2004년부터 생리용품에 붙는 부가가치세가 폐지된 국가다. 다른 나라와 견주어 봐도 비교적 빨리 ‘생활필수품’의 지위를 획득한 편이다.

그럼에도 생리대에 대한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2016년 ‘깔창 생리대’ 논란은 한국에서 관련 입법이 정비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생리대 살 돈이 없어 깔창을 사용한다는 청소년들의 사연이 알려지자, 국회는 지난해 11월 ‘청소년복지지원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등 대응에 나섰다. 정부가 청소년에게 필수 보건위생용품을 지원할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생리대 지원을 받는 대상은 기초생활수급, 법정 차상위, 한부모가족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바우처 제도’ 도입으로 여성들이 각자에게 필요한 제품을 직접 구매할 수 있게 된 것도 중요한 진전이다. 법안은 지난 6월부터 시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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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국내 생리대의 개당 평균가격은 331원으로 덴마크(156원)보다 2배 이상 비싸고, 일본이나 미국(181원)이나 프랑스(218원)에 비해서도 상당히 높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출처 서울시여성가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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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소득층 복지를 넘어 보편적인 인권 차원에서 생리대 접근성을 늘려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문가들은 OCED 최고 수준(개당 평균가격 331원)인 생리대 가격이 해결되지 않는 한 ‘안전하게 생리할’ 여성들의 권리는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의 생리 용품 업계는 상위 3개 업체가 시장의 75%를 점유하는 독과점 시장이다. 이중 업계 점유율 선두(47%)인 유한킴벌리는 2010년부터 7년간 생리대 가격을 140회 넘게 인상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 대상에도 올랐다. 공정위는 1년반 간의 조사 끝에 지난 5월 “유한킴벌리의 가격인상을 시장 지배력을 이용한 남용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리대 가격 인상폭(19.7%)이 재료비 상승률(12%)이나 원가 상승률(25.8%)에 비해 크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생활필수품인 생리대의 가격 안정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비판도 거세다. 특히 지난해 ‘독성 생리대’ 파문은 저소득층이 아닌 여성들도 안전하게 생리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생리용품 업계는 화학물질 첨가를 최소화한 프리미엄 생리대를 속속 내놓고 있지만, 개당 500원~800원, 월 3~4만원에 달하는 구입비용은 저소득층 뿐 아니라 중산층 이상의 여성에게도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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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소영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현재는 안전하게 생리를 하기 위한 비용 부담이 여성 개인에게 오롯이 전가되고 있다”며 “정부가 생리대의 제조·허가 단계에서부터 안전성 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편, 생리대의 가격 인상 억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이미 행동에 나섰다. 서울시 의회는 지난 14일 공공기관 화장실에 긴급 생리대를 배치할 수 있도록 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화장실 비누나 휴지처럼 생리대도 필요한 ‘누구나’ 무료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원미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 늘푸른여성팀장은 “그동안은 각 기관에서 긴급 생리대를 비치하고 싶어도 관련 법령이 없어 선거법 위반의 소지가 있었다”며 “이번 조례 통과를 계기로 서울시 각급 기관에서 공공 생리대 지원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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