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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명절후 이혼율 높다는데...'명절각자도생' 이혼율 낮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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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에 사는 윤소정(48)씨는 종갓집 맏며느리다. 집안에서 ‘어른’으로 모시는 분이 30명이나 되고, ‘며느리’라고 불리는 사람이 10명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윤씨는 결혼 후 20년간 일과 가사로 벅차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명절마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일했다"는 윤씨는 올해 남편과 시댁에 선언했다. "혼인계약서 쓰자!"

변호사 공증까지 받은 혼인계약서에는 "명절에 부부 중 한 명만 시댁의 차례에 참석하면 된다"는 조항을 넣었다. 혼인계약서 작성은 물론 쉽지 않았다. 그는 "혼인계약서를 쓰겠다고 하니 시어머니가 심한 말이 담긴 카카오톡 메시지를 수십 통 보내는 등 막장 아침 드라마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며 "시어머니에게 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으면 이혼 소송을 내고 위자료로 10억원을 요구하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합의를 해줬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윤씨는 올해 추석부터 시댁에 가지 않는다. 물론 차례 음식도 전혀 차리지 않는다. 대신 집에서 조용히 휴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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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혼인계약서를 쓰지 못했으면 이번 추석에도 시댁에 가서 이불빨래 다 하고 어르신 30명을 대접하기 위해 장을 보고 밥을 지어다 날랐을 거에요. 종갓집 맏며느리의 부담은 정말 상상 이상이에요. 정말 올해까지 이 짓을 해야 했으면, 차라리 이혼했을 거에요." 윤씨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결혼한 이들에게 명절은 공포다. 부인은 명절 음식 장만과 뒤처리 같은 가사 노동으로 몸이 지치고, 여기서 받는 스트레스로 부부싸움도 일어난다. 싸우다 지친 부부들 사이에서 최근엔 윤씨처럼 아예 명절을 따로 보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각자의 부모 집으로 쪼개져서 명절을 보내자는 ‘각자도생’ 합의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추석에 아내는 부산 친정, 남편은 서울 본가로 갔다가 연휴가 끝날 때 같이 만나기로 한 결혼 5년차 주부 박소현(31)씨가 그런 사례다.

"명절에 하루 종일 음식 장만하고 밥해서 식구 먹이고 돌아서면 설거지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집 현관문 비밀번호도 잘못 누를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져요. 그런데 시아버지는 자전거 타러 나가서 집에 없고, 신랑과 시동생은 누워만 있고요. 심지어 동서도 일 다 해 놓으면 오는 거 있죠." 박씨의 말이다.

불만이 쌓여 있던 박씨에게 불을 지른 건 시어머니다. 그는 지난해 추석에 몸이 아파 입원해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남편 밥 못 챙겨서 어쩌느냐"는 말만 했다는 것. 박씨는 "그 말 듣고 나니, 며느리로서의 제 자신이 지긋지긋해지더라"고 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추석엔 시댁에 가지 않겠다. 시댁엔 남편 혼자 가라. 나는 친정에 가겠다"라고 선언했다.

직장인 윤연주(32)씨는 올추석 시어머니 최모(63)씨와 ‘파업 동맹’을 맺었다. 윤씨의 시어머니는 추석 연휴 남편과 해외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차례가 아니라도 모이는 순간 노동은 여자들 몫이니, 아예 추석 연휴를 각자 보내기 위한 것. 윤씨는 "명절노동에 그냥 불참해버리면 일을 집안의 다른 여자들에게 미루는 꼴이 되는데 시어머니가 이 지긋지긋한 노동의 굴레를 먼저 끊어주신 것"이라 말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명절 지내기’는 명절 후 급증하는 이혼율을 낮추는 효과가 있을까.
명절 기간 가정폭력 신고와 이혼신청 건수는 급증한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16년 하루 평균 298건의 이혼신청이 접수됐지만, 설과 추석을 전후로 10일간은 하루 평균 656건의 이혼신청이 접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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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작가 ‘서늘한 여름밤’(본명 이서현)은 추석 연휴에 시댁에 가지 않는 여성들과 함께 추석 당일인 24일 모임을 연다. /’서늘한 여름밤’ 블로그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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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고 홀로 보내는 기혼 여성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위한 행사도 마련됐다. 필명 ‘서늘한 여름밤’으로 웹툰을 그리는 작가 이서현(30)씨는 지난해 결혼 첫 해부터 남편과 명절을 각자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올해 추석 당일인 24일, 서울 광화문의 한 음식점에서 추석 연휴를 배우자와 따로 보내는 여성끼리 모이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이씨는 "이번 추석엔 모르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산책을 하며 어쩌다 명절에 부부가 따로 보내게 됐는지 이야기를 나누겠다"며 "첫 모임은 15명으로 진행되지만, 앞으로 규모를 키워 명절마다 모임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정순화 고려대학교 가정교육과 교수는 "여성들은 명절에 시댁에서 물리적인 ‘가사 노동’ 뿐 아니라 시어머니·동서 눈치 보기 등 감정적인 스트레스에도 시달린다. 대다수 남편들은 아내들을 제대로 공감해주고 정서적으로 지지해주지 않았다"라며 "그래서 아내들이 시가 방문을 거부하고, 부부가 명절을 따로 보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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