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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터치! 코리아] 남쪽에서만 '사람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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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에도 외면한 北 '집단체조'… 文 대통령 손뼉 치고, 연설까지

"집단체조는 아동노동의 하나" 남들 아는 걸 대통령은 안 보나

조선일보

박은주 디지털편집국 사회부장


1989년 6월 30일 오후 1시 30분 평양에 도착한 전대협 소속 대학생 임수경은 45일간 북한에 머물렀다. 남쪽만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임수경은 "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라 했고, 8월 김일성종합경기장에서 열린 집단체조 '오늘의 조선'을 관람하다가 퇴장했다. 북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집단체조는 북한에 대해 낭만적 동경이 있었을 그 시대 운동권에게도 소화하기 어려운 이데올로기 행사였을 것이다.

집단체조는 국가가 개인의 신체를 동원해 훈련하는 관제(官製) 예술 행위다. 이걸 보고 기괴한 느낌을 받는 게 '자유 시민'의 평균 정서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북한에서 집단체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을 관람했다가 여론의 매를 맞았다. 2009년 북한에 억류된 미국 여기자들 구명을 위해 방북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아리랑' 공연 관람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장군님 모시고 행사하는 그날을 그리며 아픈 것도 참고 훈련합니다." 북한 집단체조에 참가하는 소녀와 가족의 삶을 다룬 BBC 다큐멘터리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어떤 나라)'에서 북한 소녀 박경선은 이렇게 말했다. 2002년 아리랑 축전 연습에는 '2억 시간'이 들었다. 유치원생부터 성인까지 10만명이 컴퓨터 '픽셀'처럼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북한 집단체조는 상상하기 힘든 노동이 들어간다.

유엔북한인권위원회는 이걸 '아동 노동'의 하나로 봤다. 정권이 어린이를 동원한 집단체조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체와 정신을 훈련해 "수령님 보여드릴 기대에 몸과 마음이 부들부들 떨리게" 만드는 나라는 북한뿐일 것이다.

방북한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밤, 북한의 최신판 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후 15만명 앞에서 연설했다.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대통령은 북한 주민들의 눈물, 땀, 고통, 공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18일 평양에 도착했을 때, 도심 카퍼레이드를 할 때, 20일 백두산 등반길에도 사실 대통령은 그랬다. 대통령이 움직일 때마다 환영 인파가 수만 명 나왔다. 대통령 얼굴에 보름달이 떴다.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비슷한 옷차림에 같은 꽃을 들고, 발 동동 구르는 '타이밍'까지 기막히게 맞추던 그들이 대통령 눈에는 '자발적 시민들'로 보였을까.

〈회장님 초청 VIP 방문 행사 안내. 오전 6시 현장 대기. 여성은 원피스에 화장 필수. 환영 꽃 지참. VIP 도착하면 함박웃음, 발 동동 구르며 환호할 것. 행사 예상 시간: 3시간〉 우리 어느 기업에서 이런 공지를 올렸다고 가정해보자. 기업 회장은 '갑질'로 몰려 새벽닭이 울기 전에 3번 압수 수색 당하고, 집안 3대가 여론과 사법의 심판대에 섰을 것이다.

줄 맞춰 '국민 체조'를 하고,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체력장'을 치르던 시대가 있었다. '산업화를 위한 신체 개조 작업' '육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 '변형된 파시즘' '일제의 유산'…. 이런 비판을 받고 사라졌다. 한국에서 국민 체조 꼴이 보기 싫은 사람이라면, 북한의 집단체조에는 몸서리를 치는 게 정상이다. 불가피하게 봤다면 그 자리를 빨리 떠야 했다. "손님으로 가서 잔칫상을 엎을 수는 없지 않으냐"고 말하려면 표정 관리 좀 해야 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봉건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신체 갈취 시스템'에 왕관을 씌워줬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남쪽에서나 하는 말이었나 보다.

[박은주 디지털편집국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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