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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시론] 화려한 의전의 값비싼 청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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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의전 파격적이었지만 北 비핵화 진전 거의 없어

군사 분야 합의는 속도 위반, 절차와 韓·美 공조도 우려돼

조선일보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


냉전 구조를 해체하는 한반도 평화 시대 개막인가 아니면 북한의 위장·사기 전술에 속은 위기의 시작인가. 평양에서 열린 올해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명히 나뉜다. 화려한 행사, 파격적 의전과 달리 김정은 위원장의 육성 발언과 합의된 문서는 별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비핵화 문제다. 현재 북한은 셀프(self·자기) 비핵화를 추구하고 있다. 비핵화 대상과 폐기 방법 그리고 보상 내용을 스스로 정하려 든다. 풍계리, 동창리, 영변 핵 시설 등으로 대상을 옮겨가는 살라미(salami·조금씩 잘개 나누는 방식) 전술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는 전문가의 '참관'을 말했는데 이는 단지 폐기 과정을 '보여준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래서는 협상이 진행돼도 북한에 비밀 핵 시설이 몇 개나 있고, 핵물질이 얼마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북한이 마음을 바꿔 협상을 중단하는 순간에도 그들의 핵 능력은 예전 그대로다.

미국은 북한의 영변 핵 시설은 물론 원심분리기를 통해 고농축우라늄을 만드는 비밀 핵 시설까지 모두 '신고'하고 '검증'하기를 희망한다. 여기에는 핵 리스트(목록) 제출이 필수이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전문가들이 핵 리스트를 제공받아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실질적 사찰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이번 회담에 대한 미국의 환영은 형식적이다. 북한과 만나 변화가 있는지 보겠다는 것이지, 남북 간 합의 내용을 수용하겠다는 게 아니다. 정의용 특사의 전례를 보면 우리 정부가 미국에 전할 메시지도 특별한 내용이 아닌 것 같다.

군사 분야 합의는 속도위반이다. 핵 협상은 시작도 안 했는데, 재래식 군축(軍縮)은 너무 빨리 나갔다.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비행금지구역 설정에 합의함으로써 우리가 북한에 대해 유일하게 월등한 강세에 있는 감시·정찰 능력이 무력화됐다. '사실상 무장해제'라는 평가가 나온다. 서해의 완충 지역 설정은 누가 했는지, 민간에서 부동산 거래를 이렇게 했으면 소송감이다. 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해 북한이 무력 증강까지 간섭할 수 있는 조문을 포함시킨 것도 실책에 가깝다. 북한이 군사공동위에서 우리의 군사력 강화에 이의를 제기하면 중대 문제가 된다. 북측은 이를 핑계로 비핵화를 중단할 수도 있다.

평화는 '대화'와 '억제'라는 두 바퀴로 굴러간다. 억제력 유지도 평화 유지의 한 방법인데 평양회담에서 억제력 유지를 쉽게 포기한 것은 유감이다. 우리 사회에서 툭하면 '한반도 전쟁 공포'를 말하지만 최근 10년간 한국 증시 종합주가지수는 43% 상승했고, 국내총생산(GDP)은 2008년 1180조원에서 지난해 1730조원으로 50% 정도 증가했다. 정말 '전쟁 공포'가 우리 사회에 만연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공포'는 북한의 핵무기 실험·개발과 연평도 포격 등으로 시작되었다.

회담 과정에서 투명성 결여도 심각하다. 정부는 흥행 때문인지 극적 효과만을 노렸다. 백두산 방문이 그 백미(白眉)다. 기상이 허락되면 백두산 방문을 고려한다고 했으면 될 것을 끝까지 숨기니 '쇼'란 말이 나온다. 과정이 불투명하면 신뢰가 추락한다. 일부 반론이 있더라도 투명한 정보 공개가 필수적이다.

민주적 절차도 아쉽다. 국회의장과 각 당의 대표를 정상회담에 함께 가자는 것은 삼권분립에 대한 도전에 가깝다. 기업 총수들을 줄 세우듯 데리고 가는 모습을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보기 어렵다. 판문점 선언에 대해 비준 동의를 요청하면서도 야당에 사전(事前) 내용 설명은 없었다. 협치의 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끝으로 한·미(韓·美) 공조가 우려된다. 빈센트 브룩스 주한 미군사령관이 평양 정상회담에 대해 "유엔사령관 입장에서는 좋지만, 한미연합사령관 입장에서는 우려된다"고 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한 미군사령관 입에서 '우려'라는 표현은 금기어다. 양국 관계를 고려해 공식적인 장소에서 '환영'을 늘 얘기하는 것과 대비된다. 한·미 군사 협력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이런 문제 제기가 기우(杞憂)였으면 한다. 신고·검증을 포함한 실질적인 비핵화가 진전돼 남북 관계와 선순환을 이루는 날을 기대한다. 하지만 남북 관계에도 공짜 점심은 없다. 화려한 의전에 뒤따르는 값비싼 청구서가 올 것이다. 지금보다 더 냉철하고, 투명하며, 민주적으로 진행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야 진짜 평화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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