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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미국판 과거史 뒤집기… 한때의 위인들 줄줄이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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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원주민 탄압 등 이유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더라도 공공건물서 이름·동상 제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스탠퍼드대는 지난 18일 본관 '세라(Serra) 홀'로 돼 있는 학교의 도로명 주소를 대학 공동 창설자인 제인 스탠퍼드 웨이(Way)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애초 본관 이름은 18세기 캘리포니아주에 선교단(mission)을 모두 9개 개척한 스페인 출신의 후네페로 세라 가톨릭 신부 이름에서 땄다. 하지만 그의 선교단은 북미 원주민 거주지를 파괴하고 그들을 학살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를 성인(聖人)으로 선포했을 때에도 지역 내 반대 여론이 거셌다.

지난 14일 새벽엔 인근 샌프란시스코 시내 광장에 있던 '정착 초기(Early Days)'란 이름의 거대한 800t짜리 동상이 철거됐다. 누워있는 반(半)나체 원주민과 그에게 세례를 베푸는 듯한 모습의 가톨릭 신부, 스페인 개척자를 묘사한 이 동상은 1894년부터 이 자리에 서서 수차례 지진도 견뎌냈지만, 결국 인권 운동가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했다.

흑인 노예를 소유했거나 원주민이나 동성애자, 소수계의 인권을 탄압한 전력이 있다면, 아무리 역사적 가치가 있더라도 공공 건물에서 그 이름과 동상을 제거하는 움직임이 미 전역에서 일고 있다. '미국판 역사 지우기' 움직임은 작년 8월 말 버지니아주 샬럿빌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반대파 시위자들과 유혈 충돌을 빚고 나서 더 활발해졌다.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은 "샬럿빌 충돌 이후 '정착 초기' 동상 제거 목소리가 더 커졌고, 동상이 있던 자리에 철거 이유를 붙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몬태나주 헬레나시 당국은 1916년부터 있었던,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병사를 기리던 분수를 제거했다. 인구 2만명도 안 되는 캘리포니아주의 아카타시 중앙에 있던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동상도 오는 11월 6일 주민투표로 운명이 최종 결정된다. 매킨리는 흑인 노예제 폐지와 흑인 인권 신장에 기여했지만, 북미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백인 정착촌을 확장한 전력(前歷)이 발목을 잡았다.

지난 11일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UC) 법대가 내부 격론 끝에 '볼트 홀(Boalt Hall)'이란 건물 이름을 삭제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존 볼트의 유족은 100여 년 전 건물 터를 제공했지만, 존 볼트는 1882년 중국인 노동자들의 이민을 금하는 연방법을 주도했던 변호사이기도 하다.

지난 2월 피츠버그대 보건대학원도 20세기 중반 매독에 감염된 흑인 남성들의 치료를 막고 병세(病勢)를 관찰하는 실험을 주도했던 토머스 파란의 이름을 건물명에서 뺐다.

미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컬럼버스 동상도 예외가 아니다. 1792년 '신대륙 발견 300년'을 맞아 처음 들어선 컬럼버스 동상은 미 전역에 수십 개가 되지만, 미 인권 단체들과 원주민 그룹은 북미 원주민 학살의 문호를 개방한 인물이라며 동상 철거를 주장한다.

[이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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