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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터무니찾기] 격, 깨는 사람과 지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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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 격(格). 사전엔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라고 돼 있다. 얼마 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격'을 말했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국민성장론을 꺼내들며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이 대표는 "적절치 못한 용어를 쓰는 분들과 토론할 가치가 없다"고 했고 "토론도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당 대표와 야당 비대위원장의 격을 말한 것인지, 정부의 성장론과 야당의 성장론의 격을 말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급기야 김병준 위원장은 19일 "왜 격에 안 맞는지를 물어보려 한다"고 했다.

# 이해찬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노쇼'가 있었다. 평양 정상회담 첫날인 18일 북측 최고인민회의 안동춘 '부의장'과 만남이 불발됐다. 안 부의장 일행이 한 시간가량이나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북측은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불쾌감을 나타냈다는 후문이다.

'노쇼' 이유에 대해 이해찬 대표는 "일정을 재조정하고 있다"고, 이정미 대표는 "일정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시간에 정당 대표들끼리 간담회를 했다"고 설명했다. 어리둥절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만남의 상대방이 '부의장'이라서 문제 삼은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부의장이 아닌 최고인민회의 수장 격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 아니냐는 거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은 '노쇼' 당일 저녁에 있었다. 환영만찬에서 이해찬 대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면담을 즉석에서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격'을 높이려는 '민원'이 통한 셈이다.

다음날 세 대표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만났다. 면담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이해찬 대표. "정상회담 배석자 숫자가 갑자기 예상보다 많이 줄어드는 바람에 장관들이 이쪽에 합류했다. 당 대표 세 명과 장관들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돼 우리 쪽이 불발된 것이다." '노쇼' 당시 우리 측 장관 몇몇은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만나고 있었다.

급기야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라디오방송에서 "갑질 의식"이라며 "여당 대표가 대통령 발목을 잡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 여당 중진은 "소통의 차질이 아닌가 한다"면서도 "그게 상호 간 아쉬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 문재인 대통령은 방북 첫날인 18일 평양국제비행장을 떠나면서 환영하는 평양시민들을 향해 90도 인사를 했다. 최고지도자가 고개를 숙이는 일이 거의 없는 북한에선 파격이었다. 앞서 환영 인파에 다가가 손을 잡고, 눈을 맞추기도 했다. 방북 둘째날에 15만 평양시민에게 육성으로 연설하며 '비핵화'를 강조한 것도, 마지막날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백두산 천지에 올라선 것도 파격이었다.

북한 측은 첫날 공항 환영식에서 사열에 앞서 위병대장이 "대통령 각하, 조선인민군 명예위병대는 각하를 영접하기 위하여 정렬하였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지난 두 차례 정상회담 때는 '각하'란 표현이 없었다. 역시 파격이었다.

이런 파격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만큼 성의를 보이고 있다는 걸, 그만큼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 말이다. 격을 깨는, 즉 파격을 통해 상대방에게 진정성을 보여주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이해찬 대표 등은 격을 중시했던 듯하다. 격을 중시했지만 이는 진정성을 사라지게 하고 결례를 남겼다. 세 대표는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을 수행해 도왔다기보다는 결과적으로 '잡음'을 만들어 부담을 준 셈이 됐다.

[이상훈 정치부 국회반장 겸 레이더P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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