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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책과 미래] 사랑과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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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 달에 한 차례, 청중들과 함께 고전문학 작품을 읽는다. 최근에 읽은 것은 바그너의 오페라로 잘 알려진 '트리스탄과 이졸데'. 12세기 중반 프랑스 남부에서 나타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기이한 행동양식, 즉 운명적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숙모와 조카 사이로 기사와 레이디가 될 운명이다. 그러나 이졸데를 호송하는 배 위에서 실수로 들이마신 '사랑의 묘약'이 두 사람을 "하나의 심장"으로 묶어놓는다. 바그너는 묘약의 힘을 이렇게 찬양한다.

"하루를 못 보면 병이 들고, 사흘을 못 보면 죽는다네." 벼락처럼 찾아와 삶 전체를 사로잡아 금지된 것을 끝없이 갈망하게 만들고, 이로 인한 기쁨과 고뇌를 함께 맛보게 하는 사랑의 형식. 운명적 사랑은 연인의 존재로 인한 즐거움과 사회적 제약으로 인한 고통이 공존하는 사랑이다. 트리스탄 전설을 서사시로 완성한 시인 고트프리트는 "둘은 사랑과 고통에서 한 몸"이라고 이 사랑을 요약했다.

운명적 사랑은 완전히 낯설다. 이전엔 이런 사랑이 없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은 죽음을 파고드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배경에 가깝고,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은 신이 던져 준 선물이나 다름없으며, 아이네이아스와 디도의 사랑은 영웅이 사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다르다. 둘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이끌림'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피하고 싶지만 물리칠 수 없어서 순식간에 몸과 마음을 내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어진 삶의 형식, 즉 금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생'을 발명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음을 바라게 된다. 자신의 내부에서 용솟음치는 욕망과 생명의 약동에 취해서 이졸데와 포옹한 트리스탄은 말한다.

"죽음이여, 올 테면 오라!"

단테와 베아트리체, 로미오와 줄리엣, 베르테르와 로테 등이 이야기의 바다에서 겪었던 사랑이고, 오늘날 모든 이들이 일생에 한 번쯤 경험하고 싶은 사랑이다. 그러나 '운명적 사랑'은 단순히 연애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한히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 즉 창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종류의 낡은 제약을 초월해야 하기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상상하지 못할 대담함과 놀라운 혁신성을 보여준다. 가령, 연인의 고통을 씻어 주는 소리를 내는 신비한 방울 같은 것 말이다. 운명적 사랑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다. 두 사람은 영감이 관행을 무찌르는 세상을 꿈꾸었다. 기존의 관습을 반복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을 믿고 새로운 행동양식을 탐구하고 발명하는 자본주의적 인간이 이로부터 탄생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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