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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원고지 18장 유해용 영장기각 사유 ‘판사가 변호인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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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증거인멸 가능성에 “그럴 염려 없다”

기밀유출 혐의도 중대성 축소

“통상적인 내용…공무상 비밀 아니다”

사법농단 피의자 면죄부 물꼬 틀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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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수수색영장 심사는 구속영장 심사처럼 하고, 구속영장 심사는 본안 재판처럼 하고 있다. 나중에 재판은 제대로 할까? 이럴 거면 수사도 하지 말고 재판도 안 하는 게 낫다.”

사법농단 의혹 문건을 포함해 증거 수만 건을 파기한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현 변호사)의 구속영장 기각 사유를 본 한 판사가 내놓은 촌평이다. 그는 법원이 내놓은 기각 사유가 마치 ‘변호인 의견서’처럼 보인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 허경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20일 밤 10시께 유 변호사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200자 원고지 18장에 달하는 장문의 기각 사유였다. 주요 사건의 경우 자정을 넘겨서야 몇 줄의 짤막한 사유를 공개했던 것에 비추면 이례적으로 설명이 길었다. 긴 설명을 잘 보란 듯이 ‘설명문’은 일찍 내놓았다.

하지만 21일 상당수 법조인들이 ‘형사재판 판결문 수준의 기각 사유가 오히려 의문을 증폭시키고, 중대한 범죄 혐의에 전면적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 “현실화된 ‘증거 인멸’ 외면” 주요 구속 사유인 ‘증거 인멸 가능성’에 대해 허 판사가 “그럴 염려가 없다”고 단정한 것이 가장 문제로 꼽힌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보고서 문건 유출 등은 “죄가 되지 않거나, 죄가 되는지 의문”이기 때문에, 수사를 앞두고 문건을 파기한 게 “범죄 증거를 인멸한 행위로 볼 수 없다”는 논리다. 허 판사는 심지어 유 변호사가 문건 파기를 결심한 이유가 검찰과 언론보도 때문이며, 문건 파기 자체가 정당하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검찰이 언론에 알린 압수수색영장 기각 사유(범죄 불성립)를 유 변호사가 알게 된 뒤, 또 다시 (범죄 혐의와) 무관한 정보의 압수수색이 이뤄질 것을 우려해 삭제했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는다’→‘그래서 다른 혐의도 죄가 되지 않는다’의 무한 반복인 셈이다.

하지만 구속사유로서 ‘증거 인멸 가능성’을 판단할 때, 혐의의 유·무죄 판단을 전제로 좁혀 보지는 않는다는 게 복수 법조인의 지적이다. 통상 구속사유에서 말하는 증거는 ‘수사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혐의에 대한 증거’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유 변호사가 검찰에 “문건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써내고도 유출 문건을 무더기 파기한 점도 허 판사가 외면한 대목으로 꼽힌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이미 증거를 인멸했다면, 앞으로도 그럴 우려가 높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라고 했다.

■ “보고서 유출 중대성 축소” 허 판사가 기밀유출 혐의(공무상 비밀누설)의 중대성을 애써 축소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유 변호사는 2016년 2월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 박채윤씨의 특허소송 상고심 관련 재판연구관 보고서를 청와대에 넘겼다는 의혹을 받는다. 박 전 대통령 지시를 받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에게 직접 전화하고, 이를 보고받은 박 전 대통령이 박씨에게 “잘 해결될 거라던데요”라고 알려준 정황도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보고서에는 사건 쟁점과 관련 사건 처리 현황, 주심 대법관 보고 내용과 계획, 기술조사관 이름과 검토 계획 등 정보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수석이 대법관과 직접 통화한 결과 얻을 수 있는 정보였는데도, 허 판사는 유 변호사가 유출한 문건이 ‘재판의 통상적 처리절차’만 담고 있어 ‘공무상 비밀’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 판사는 “그간 법원이 ‘재판의 본질적인 부분에 관한 비밀’이라는 이유로 재판연구관 보고서 압수수색이나 임의제출을 거부해온 점에 비춰, 연구관 보고서가 ‘공무상 비밀’이 아니라는 판단은 납득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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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처의 재판개입 정당화” 같은 맥락에서 허 판사가 “법원행정처의 재판개입을 정당화했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유 변호사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요구로 작성해 넘긴 연구관 보고서는 임 전 차장이 가진 문건 수만 건 중 하나에 불과하고, 유 변호사가 임 전 차장과 ‘연계’됐다는 소명이 부족해 (연구관에게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게 허 판사 판단의 요지다. 이에 대해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행정처 요구로 재판연구관에게 ‘비선 실세’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다면, 문건 규모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부적절하다고 의심하는 게 맞다”고 했다. 유 변호사가 행정처와 ‘연계’됐다는 정황도 이미 여러 차례 나왔다. 유 변호사는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관련 행정처 문건을 전달받았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때 행정처로부터 넘겨받은 문건을 담당 재판연구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구속영장 기각 사유가 사법농단 다른 피의자들에 대한 ‘면죄부 물꼬’를 터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 판사 비리 수사 확대를 박기 위해 행정처로부터 받은 수사 지침을 영장판사들에게 전달하고, 영장판사들로부터 넘겨받은 수사기밀을 행정처에 ‘직보’한 의혹을 받는 신광렬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이 대표적인 예다.

①문건 파기에도 “범죄 증거 인멸 아니다”
“검찰·언론 때문에 없앤 것” 정당화
②재판연구관 보고서 ‘철통방어’ 해놓고
“보고서는 비밀 아냐” 애써 사안 축소
③행정처 재판개입 정당화… 면죄부 ‘물꼬’
④면밀한 법리 검토 없이 ‘죄 없다’ 단정
⑤구속영장을 본안재판처럼… 예단 드러내


■ “법리 오해해 무리한 판단” 허 판사가 법리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무리하게 ‘무죄’ 판단을 내린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유 변호사 유출한 재판연구관 보고서가 ‘사본’이라서 ‘공공기록물’(원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대표적인 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근무 경험이 있는 판사는 “연구관 보고서는 ‘재판연구관보고서 관리시스템’에 등록하는 순간 그 내용 자체가 원본이다. 등록번호를 부여해야만 공공기록물이 되는 게 아니다”고 했다.

허 판사는 또 “유 변호사가 보고서 파일을 전달받은 시점에는 개인적으로 사용할 의도가 없었다”고도 했다. 하지만 보고서 유출이 문제된 것은 지난 1월 유 변호사가 퇴직하면서부터다. 범행 발생 시점(2018년 1월)을 보고서 전달 시점(2017년 1월 이전)으로 ‘소급’해 ‘문제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연구관 보고서에 포함된 사건 당사자 이름, 사건번호 등 무단 유출) 혐의에 대한 판단도 같은 비판을 부른다. 허 판사는 “보고서에는 당사자 이름 외에 개인정보라고 할만한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보고서에 포함된 이름과 사건번호, 변호사 이름, 하급심 판결문 내용 등 정보만 조합해도 충분히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라고 볼 수 있다는 게 상당수 판사가 입 모으는 지점이다. 법원은 휴대전화번호 일부를 유출한 경찰관에 대해서도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

■ “‘구속수사 불허’ 선포했나” 앞서 ‘사법농단’ 압수수색 영장을 구속영장 수준으로 까다롭게 걸러내온 법원은, 구속영장은 본안 재판 수준으로 엄격히 심사했다. 통상 수사단계에서는 본안 재판의 유·무죄 예단을 피하기 위해 구체적 발부·기각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하지만 허 판사의 기각 사유 곳곳에는 유 변호사 진술을 근거로 ‘죄 없다’고 단정지은 표현이 등장한다.

영장판사들은 유 변호사가 유출한 재판연구관 보고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앞서 압수수색 영장을 사실상 모두 기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허 판사는 “공공기록물이 아니다”, “개인적 목적이 없었다”고 전제한 뒤, “죄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한 판사는 “앞으로 ‘사법농단’ 관련 어떠한 구속수사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허 판사는 유 변호사가 대법원 근무 시절 취급한 사건을 퇴직 뒤 수임해 승소한 혐의(변호사법 위반)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일부 소명됐다고 봤다. 하지만 법정형(최대 징역 1년)을 고려할 때 구속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차관급 고법 부장판사의 ‘전관예우’에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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