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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제사가지 말고 나랑 놀자"...또다른 추석 꿈꾸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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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제사 가지 말고 나랑 놀자’ 행사 개최자인 웹툰 작가 ‘서늘한 여름밤’ 이서현씨(30)가 19일 오후 서울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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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더 구울까?” 엄마가 말했다. “괜찮아, 우리 많이 먹었어.” 가족들은 자신의 배부름만을 알았다. 부엌에서 일을 마친 뒤 식탁으로 온 엄마는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자신이 가족 일원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차례 일을 하러 온 사람으로 취급 받는다고 느꼈다. 엄마가 이를 부당하다고 말하는 데까지는 20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유명 웹툰 작가 ‘서늘한 여름밤’(필명) 이서현씨(30)가 기억하는 명절 풍경이다. 그는 이번 추석에도 시댁에 가지 않는다. 2016년 결혼 이후 3년째다. 이씨 남편은 홀로 시댁에 가 친척들과 함께 차례상을 차리는 것을 돕는다. 이씨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부계 제사(차례) 준비에 희생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남편과 나눴다. 남편은 시댁에 이런 입장을 알렸고 시댁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씨 부부는 명절이 아닌 때 1년에 한두번씩 시댁에 내려가 시부모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씨는 이번 추석에 그처럼 차례를 지내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을 만나기로 했다. 지난 13일 자신의 블로그에 ‘제사 가지 말고 나랑 놀자’라는 행사 홍보글을 올렸다. 차례에 참여하지 않는 여성끼리 추석 당일인 24일에 모여 점심식사를 하자는 것이다. 글을 올린 지 4시간 만에 40여명이 신청했고 15명이 모이기로 했다. 미혼과 기혼, 비혼 여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에 불참하는 데 용기가 필요한 이들을 우선했다.

“예전에 어떤 행사에서 자신도 시댁 제사를 안 간다고 말한 기혼 여성을 봤는데 굉장히 반가웠어요.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반가운데 당일에 모여서 얘기하고 밥을 먹으면 너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19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이씨의 말이다.

이씨는 어린 시절부터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엄마가 명절 때 겪는 일을 보면서 굉장히 불합리하고 불쾌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시댁에 가면 오랫동안 나를 모르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내가 부엌에 가서 일할 거라고 기대하는 상황이 싫었어요. 혹은 내가 가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앉아있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다고 예상했죠. 가야할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어요.”

이번 추석부터 친정에도 가지 않는다. 차례를 둘러싼 가족 갈등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명절 며칠전부터 항상 집안에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어요. 결국 어떻게든 싸움으로 촉발됐죠. 엄마는 ‘왜 너희 어머니는 차례를 줄이겠다고 하면서 전혀 줄이지 않냐’고 아빠에게 화내셨어요. 아빠는 중간에서 ‘자기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수수방관하셨죠. 그렇게 불같이 싸우다가도 때가 되면 다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차례상을 차리고 절을 올렸어요.” 그는 이제 ‘나만의 명절’을 만들고 있다.

이씨처럼 명절에 제사를 지내기를 거부하고 색다른 방식으로 명절을 보내는 여성들이 점차 생기고 있다. 경기도 수원의 한 여성단체인 ‘수원여성회’는 22일 오후부터 24일 정오까지 2박 3일 동안 ‘탈명절 캠프’를 연다. 주최 측은 “연휴에 식당 문 닫아서 먹을 것이 걱정되는 분, 연휴에 딱히 만날 사람이나 갈 곳이 없는 분, 약속 없이 가족들 안 만나기 마음 불편한 분, 그냥 오고 싶은 분” 등 명절에 차례를 지내러 가지 않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고 밝혔다. 식비만 받고 각자 집에 있는 술과 고기, 반찬을 함께 가져와 먹으며 놀 예정이다.

올해 결혼 12년차인 주최자 ‘봉봉’(활동명)씨는 말했다. “명절을 완전히 불참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지난 휴가 때 시댁과 불편한 일이 생겨 다시 볼 마음이 없어 시댁에 안 가기로 했어요. 상처가 다독여지면 다시 갈 것 같아요. 이번 명절에는 다양한 분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 행사를 기획하게 됐어요.”

2년 전부터 명절에 집을 찾지 않는 미혼 여성 ㄱ씨(27)는 명절마다 혼자 호텔에 가곤 했다. 텅빈 서울 시내를 즐겼다. 외식을 하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거나 퍼즐을 맞추기도 했다. 이번 추석에는 애인과 함께 호텔에서 쉬고 바다를 보러 갈 계획이다.

ㄱ씨도 어머니 등 여성에게 차례 준비의 모든 부담이 가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차례를 거부한 경우다. 그의 집은 ‘큰집’으로 ㄱ씨 어머니가 30년째 차례 준비를 도맡는다. “엄마의 명절은 온통 집안일 연속이에요. 며칠 전부터 장을 보고 재료들을 다듬습니다. 전날이 되면 본격적인 명절 음식 요리를 시작해요. 각종 전과 튀김 등 기름을 잔뜩 뒤집어쓰고 허리와 무릎을 혹사하죠. 밀가루와 계란 범벅이 된 그릇들을 씻고 기름이 튄 주방을 정리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에요. 명절에 아빠가 하는 일은 고작 밤을 깎거나 차례를 지내거나 손님들과 술을 마시는 일 뿐이에요.”

ㄱ씨는 그중 최악이 여자 상과 남자 상을 따로 차리는 것이라고 했다. “남자 상은 안방에 차려지고 음식도 더 많아요. 엄마와 숙모들은 주방 앞에 마련된 작은 상에서 식사를 했어요. 남자들의 상에서 물이나 밥이나 기타 다른 것들을 주문하면 수시로 주방을 왔다갔다 하며 날라줬죠. 제가 어른이 되자 큰 상에서 작은 상에 앉으라고 했어요. 저는 작은 상에 앉기 싫었어요.”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가부장제의 집약판이 명절”이라고 입을 모았다. 가부장인 남성 중심으로 가정이 돌아가는 가부장제가 특히 명절날 압축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여성은 며칠간 자신의 조상도 아닌 부계 조상 차례를 지내기 위해 상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을 도맡고 남성은 여성을 배제한 채 차례 의식 주체가 된다.

ㄱ씨는 말했다. “이 모든 게 가부장제의 존속 방법이라는 걸 알았어요. 가부장제는 여성 착취로 굴러가니까요. 남의 집 딸인 엄마가 못하면 역시 남의 집 딸인 숙모가, 그것도 아니면 결혼하지 않은 딸이 노동을 하죠. 이 과정에서 남자들은 쏙 빠져있고요. 만약 엄마가 어느 날 아프거나 돌아가셔서 제사를 준비하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아빠는 그래도 제사를 지낼까요? 아내가 없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남자들, 유교나 전통 어쩌고는 핑계고 아내나 며느리를 착취하는 전형적인 대리 효도, 가부장제의 상징인 거죠.”

이들은 변화한 시대에 맞게 명절에 대한 상상력이 넓어지기를 바란다. 꼭 차례를 지내지 않더라도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으면 한다는 얘기다. 이씨는 “나처럼 집에 아예 안 가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거나 각자가 음식을 가져오는 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으면 한다”며 “차례 방식이 태초부터 고정된 게 아니니 시대상에 맞게 고민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ㄱ씨도 “여성의 가사노동을 갈아넣어 유지되는 가부장적 행태를 21세기에도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라며 “전통이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매일 한복을 입고 다니거나 상투를 틀고 다니지 않는다.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 돌아가신 분들을 떠올리며 즐겁게 식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제사나 명절의 의미는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가정 내에서 여성에게 모든 차례 일을 떠맡고 차례를 지내기를 강요하기보다 서로 입장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혼 9년차인 황모씨는 말했다. “차례를 지내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어도 각자의 의견과 가치관을 존중하는 관계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이런 관계가 진짜 가족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황씨는 지난해 이런 내용의 문자를 시어머니에게 보낸 뒤 색다른 명절을 보내고 있다.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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