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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오빠 죽인 놈 이야기가 영화로… 유가족엔 전화 한통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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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고시생 살인 피해자 여동생, 영화 '암수살인' 상영금지 신청

"가족들 가슴에 두번 대못 박아"… 배급사측 "마케팅때 조심할 것"

조선일보

다음 달 3일 개봉할 영화 ‘암수살인’ 포스터. /쇼박스


"제가 김윤석씨 팬인데, 영화관에서 오빠 살인 사건을 볼 뻔했어요."

박진영(가명·46)씨는 다음 달 3일 개봉하는 김윤석 주연 영화 '암수살인(暗數殺人)'의 예고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 영화는 2007년 부산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박씨는 피해자 여동생이다. 그는 20일 서울중앙지법에 영화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했다. 박씨는 "영화 때문에 가족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2007년 11월 26일 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박씨 오빠(당시 38세)는 부산 중구 부평동을 걷다가 이모씨와 어깨를 부딪혔다. 그러자 이씨는 주머니에 있던 접이식 칼로 박씨의 목과 허리를 찔러 숨지게 하고, 시신을 인근 건물 지하로 옮겨 불을 질렀다. 박씨에 따르면 영화는 사건 연도를 2007년 대신 2012년으로 바꿨지만 극 중 인물의 나이, 범행 수법을 원래 사건과 똑같이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박씨는 "오빠가 범인 칼에 찔린 지역까지 그대로 묘사됐다"고 했다.

영화가 실화를 소재로 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박씨에 따르면 오빠 사건은 지방 신문에 나고 잊힌 사건이었다. 어머니(77)는 사고의 충격으로 인지 장애를 겪다가 지금은 치매가 있어 아들에 대한 기억도 희미하다고 한다. 친척과 이웃들에게는 오빠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알렸다. 박씨는 "영화가 나오면 가족이 다시 그때로 돌아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영화 배급사 관계자는 "특정 인물을 암시할 수 있는 부분은 제작 과정에서 최대한 삭제했다"며 "피해자 측이 다시 고통 받지 않게 마케팅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박씨 가족의 변호를 맡은 유앤아이파트너스 정재기 변호사는 "영화 제작 단계에서 실화를 차용할 경우 최소한 유가족과 조율해 각색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과거에도 실화 소재 영화가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다. 1991년 이형호(당시 9세)군 유괴 사건을 다룬 영화 '그놈 목소리'는 이군 가족과 유괴범의 통화 녹음을 그대로 실었다가 이군 유족이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을 소재로 한 '그때 그 사람들'도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고인과 유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일부 내용이 삭제됐다.

정한중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다른 영화들은 소재로 삼은 사건들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건이었다"며 "반면 이번 영화에 나오는 박씨 사건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고 유가족이 정신적 고통을 입는 상황에서 동의 없이 그대로 영상 제작해 공표하는 것은 인격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윤동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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