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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서민 부모 서럽게 만드는 예방접종 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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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한 의사·기자의 메디 톡 톡]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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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과 겨울에는 유독 독감에 걸린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분명 독감 예방주사를 맞았는데도 독감에 걸렸다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생후 6개월부터 만 12세까지 무료로 접종하는 독감 백신에 포함되지 않은 독감 바이러스가 유행한 탓입니다. 이를 독감 백신과 유행 독감 간의 ‘미스매치’라고 합니다.

독감 백신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권고에 따라 A형 바이러스 2종(H1N1, H3N2)과 B형 2종(빅토리아, 야마가타) 중 그해 유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바이러스를 조합해 만듭니다. 3가 독감 백신은 A형 2종이 모두 포함되고 B형 2종 중 하나만 포함합니다. 3가란 쉽게 말해서 3가지 독감 바이러스를 예방한다고 보면 됩니다. 반면 4가 독감백신은 A형 2종과 B형 2종을 모두 포함합니다. 하지만 4가 백신은 환자가 4만 원가량을 자비로 부담해야 하는 유료 접종입니다.

이 때문에 부모들 사이에서는 “3가 백신을 무료로 접종했는데 아이가 독감에 걸렸다”면서 “돈 아끼지 말고 4가 백신을 맞힐 걸 그랬다”는 후회 섞인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갖게 만드는 또 다른 백신이 있습니다. 바로 자궁경부암 백신입니다.

2016년부터 자궁경부암의 예방을 위해 만 12세 여아에게 무료로 접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지원하는 백신은 자궁경부암 2가 백신과 4가 백신, 두 종류입니다. 그런데 시중에는 이미 자궁경부암 9가 백신이 나와 있습니다. 9가 백신은 국가에서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두세 차례 맞히는 비용을 가정에서 부담해야 합니다. 회당 비용은 20만 원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선 딸의 건강을 위해 9가 백신을 접종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한 제약사의 9가 백신 매출 자료에 따르면 서울 25개 자치구 중 강남 지역의 매출이 서울 전체 9가 백신 매출의 약 65%를 차지했습니다. 또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등 소위 강남 3구의 매출은 강북에서 매출이 가장 높은 3개구(마포구 서대문구 은평구)보다 약 3배 높았습니다.

2, 4가 백신에 비해 9가 백신에는 더 많은 바이러스 유형을 포함하고 있어 자궁경부암을 90%까지 예방할 수 있습니다. 또 9가 백신은 자궁경부암, 질암, 항문암 등 각종 암을 유발하는 ‘고위험’ 유형의 바이러스를 막아줍니다. 그러나 현재 국가에서 지원하는 2, 4가 백신은 이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을 예방하지 못합니다.

일본뇌염 백신도 동일한 상황입니다. 일본 뇌염 백신은 생백신과 사백신이 있는데 현재 국가예방접종에는 사백신이 포함돼 있습니다. 사백신은 생후 12개월에 2회를 맞고 24∼36개월, 만 6세, 만 12세에 각 1회를 맞아 12년 동안 총 5회 접종을 해야 합니다.

반면 생백신은 영유아에서 생후 12개월, 24∼35개월 사이에 1회씩 2번 정도 맞으면 됩니다. 대신 회당 7만 원의 비용이 듭니다. 사백신에 비해 적게 맞아도 되다 보니 역시 강남 3구의 생백신 매출이 서울 전체 매출의 18%를 차지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부모들은 국가가 지원하는 예방접종 대신 자비를 내서라도 더 효과가 좋고, 더 편리한 백신을 자녀에게 맞히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부여하는 국가예방접종 혜택이 서민 부모들을 오히려 서럽게 만드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셈이죠. 정부 입장에선 예산상 비싼 백신을 제공할 수 없겠지만 만약 제때 예방하지 못해 감염병에 걸린다면 이후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진한 의사·기자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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