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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세균 감염 우려해 김정은 서명할 만년필까지 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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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북·미 정상회담 때마다

김정은 경호원 등장 방역 작업

‘수령’ 유고 땐 체제와해 우려

실세 최용해도 3주간 격리치료

북, 막판까지 추이 관망할 듯

“확산 땐 연기 카드 꺼낼 것”

남북 정상회담에 돌출변수가 된 메르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환자 발생으로 보건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3년 전 창궐로 186명이 감염되고 그 중 38명이 사망했던 트라우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청와대와 정부 대북부처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북한에 200명 규모의 정상회담 방북단을 파견할 예정이지만 메르스라는 돌출변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각종 감염병에 취약한 북한 당국은 과민반응을 보이며 남북 당국 간 대화나 민간교류의 문을 완전히 닫곤 했다. 이번에도 메르스가 정상회담 일정에 변수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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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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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카펠라 호텔. 북·미 간 첫 정상회담 합의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 서명을 앞둔 긴장된 상황에서 행사장에 북한 경호원이 등장했다. 흰색 장갑을 낀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리할 테이블에 다가가더니 서명용 펜을 집어 들었다. 이어 미리 준비해 온 천으로 펜을 꼼꼼히 닦아 반듯하게 다시 내려놓았다. 다른 경호원은 휴대용 분무 펌프까지 들고 들어와 김 위원장이 앉을 의자와 주변 바닥 카펫을 소독했다. 이런 상황은 앞서 4월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연출됐다.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 김정은이 도착해 방명록 서명을 하기 직전 북한 경호원들이 테이블은 물론 의자 등받이와 팔걸이까지 소독약을 뿌리고 닦아냈다. 북측 요구로 우리 측이 준비해둔 서명용 펜까지 점검한 뒤 천으로 연신 문질렀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은 이 펜으로 서명하지 않았다.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건네준 펜을 사용했다. 회담 관계자는 “혹시나 펜이 세균이나 위해 물질에 오염돼 있거나 폭발물 등이 숨겨져 있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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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옆에서 세세히 챙기는 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모습. 방명록 서명 때 김정은은 준비된 펜 대신 김여정이 건넨 명품 필기구인 ‘몽블랑’ 만년필을 썼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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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이처럼 과도할 정도로 최고지도자의 신변보호에 신경을 쓰는 건 체제 특성 때문이다. 최고지도자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게 좌우되는 유일영도체제에선 ‘수령’의 지위는 절대시 될 수밖에 없다. 자칫 문제가 생기면 체제 와해로 이어질 수 있다. 주민들에게 ‘당신(김정은)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 식의 논리가 강요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북한이 수령절대주의를 주민들에게 체득게 하려 만든 ‘당의 유일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2013년)은 김일성·김정일을 결사옹위할 것을 강조하는 11쪽짜리 소책자다. 제3장은 김일성·김정일과 노동당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자그마한 요소도 절대로 융화묵과하지 말고 “비상사건화해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라”고 촉구한다. 명문화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원칙이 김정은에게도 적용되는 건 당연하다.

남한에서 벌어진 이번 메르스 사태도 북한에겐 그냥 넘기기 어려운 중대사안이다. 오는 18일로 잡힌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정부 당국자는 물론 정계와 경제계 인사, 취재진 등이 방북하기 때문이다. 200명 규모가 될 방북단은 평양에 2박3일 간 체류하는 건 물론이고 김정은 위원장이 자리할 회담장과 연회장에 함께 머물 예정이다. 예민하게 반응해온 북한의 태도로 볼 때 메르스 발병 지역인 남측 인사의 대규모 방북을 수용한다는 건 꺼림칙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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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서명에 앞서 북한 경호원이 흰장갑을 끼고 펜을 꼼꼼하게 닦고 있다. [AP,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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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우려가 있을 경우 철저히 차단당하는 건 김정은의 최측근 고위 인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북한의 명목상 국가수반으로 불리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경우 에볼라가 창궐한 지난 2014년 아프리카를 순방하고 온 뒤 북·중 국경 도시인 신의주에 3주간 격리 조처됐다. 러시아를 방문했던 최용해 당 비서(현 노동당 부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해 9월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왔던 최용해와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현재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경우 평양 귀환 뒤 한동안 김정은과 만나지 못했다. 당시 실세인사인 이들의 공개활동이 없자 숙청이나 신변이상설이 나왔지만 국가정보원은 “에볼라 감염을 우려해 격리된 것”이라고 국회 정보위에 보고했다.

외부세계의 감염병에 북한이 바짝 긴장하는 건 열악한 보건·의료 실태 때문이다. 한번 방역망이 뚫려버리면 끝장이란 절박감이 과도한 대처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메르스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조류인플루엔자(AI), 말라리아 등이 번질 때 북한은 특히 긴장하는 모습이다. 3년 전 메르스 사태 때 북한은 개성공단으로 통하는 출입경 사무소에 열 감지 카메라를 설치했고, 북측 근로자에게 마스크를 착용케 했다. 모두 북한 측 요구로 우리가 제공한 장비와 물품이다. 당시 북한은 메르스 전파방지나 예방과 관련한 의학 정보를 우리 측에 비공개리에 요청하기도 했다.

정부는 메르스 사태가 남북 정상회담에 차질을 가져올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구체적인 동향은 없다”(9월10일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는 입장이다. 정부 당국자는 “한 명의 확진환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확산을 막고 북한에 차질 없는 정상회담 개최를 설득하는 게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북한 측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메르스 사태가 통제 가능한 상황에서 수습되고 있고, 우리 방북단이 경우 철저한 사전조치로 감염우려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지난 8일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60대 남성)와 접촉한 사람들의 예후를 지켜볼 잠복기가 14일 걸린다는 점이다. 감염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22일 이전에 평양 정상회담 일정이 걸쳐있는 것이다. 자칫 북한이 이 대목을 빌미로 회담 연기 등을 요구할 경우 딱히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상황이란 데 정부의 고민이 있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은 18일 정상회담 개최 직전까지 상황을 관망할 것”이라며 “메르스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거나, 회담 테이블에 올릴 우리 측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연기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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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양옆에 앉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왼쪽)과 최용해 노동당 부위원장. [노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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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불똥이 민간교류로까지 튈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한 민간단체의 150명 규모 방북을 10월 초 받아들이겠다는 계획을 세운 상황이고, 10월 말에는 금강산에서 우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가 공동행사를 열기로 합의한 상태다. 한 당국자는 “2015년에는 6.15공동선언 15주년 행사를 합의해놓고도 메르스 사태로 인해 결국 각기 치르는 쪽으로 해버린 일이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대남 비난에 활용할 가능성을 거론한다. 3년 전 조평통은 “남조선에 치명적인 메르스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전파되면서 공포와 혼란·침체에 빠져있다”며 “부패·무능과 반인민적 통치의 결과”라고 비방한 바 있다. 당시 우리 정부가 “같은 민족으로 최소한의 예의와 상식을 지키라”고 촉구했지만 북한은 비난 공세를 그치지 않았다. 메르스를 내세운 정상회담 연기카드로 북한이 우리 정부에게 대북제재 해제와 적극적 경협을 압박하고, 내부적으로 ‘썩고 병든 남조선’을 부각 선전하는 효과를 거두려 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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