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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굿모닝 내셔널]폭염 속 1500도 화덕 지키는 ‘무쇠의 마술사’ 최용진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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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초만에 호미, 80초만에 가위 뚝딱 만들어

"쇠 두드려 농기구 만드는 전통 방식 지킬 것"

‘쾅’하고 치니 엿장수 가위 뚝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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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 대장간 최용진 대표가 19일 대장간에서 만든 엿장수 가위를 보여주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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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충북 증평군 증평읍 장뜰시장. 섭씨 35도의 불덩이 같은 날씨 속에 '쾅쾅쾅' 요란한 쇳소리가 장바닥에 울려 퍼졌다. 증평대장간 최용진(70) 대표가 벌겋게 달궈진 쇠를 모루(쇠를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 소리였다.

“엿장수 가위 아시죠. 투박해 보여도 웬만한 대장장이들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워요. 모양이 예뻐야 하고, 아귀가 잘 맞아야 소리도 잘 납니다.”

1500도가 넘는 화덕에서 꺼낸 쇠는 엿가락처럼 잘 휘었다. 최씨가 망치로 강약을 조절하며 40여 차례 두드리자 엿장수 가위 한쪽이 금세 완성됐다. 가위를 만드는 데는 약 1분 20초가 걸렸다. 그는 같은 방법으로 22초 만에 호미 한 개를 만들었다. 최씨는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호미 400개도 거뜬히 만들 수 있지만 개수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기름 질(쇠붙이를 갈고 닦는 연마작업), 열처리(담금질), 모양 잡기 등 삼박자가 맞아야 야무지고 튼튼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며 "개수 보다는 쇠를 잘 다루는 일에 더 신경 쓴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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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진씨가 화덕에서 달군 무쇠를 망치로 두드리자 불꽃이 튀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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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장장이다. 뭉툭한 쇠뭉치를 쓸모 있는 도구로 재탄생시키는 솜씨가 뛰어나 ‘무쇠의 마술사’로도 불린다. 고용노동부는 1995년 전국 최초로 최씨를 대장간 부문 기능 전승자로 선정했다. 그가 운영하는 증평대장간은 정부가 지정한 기능 전승자의 집, 증평군 향토유적 9호로 각각 지정 받았다. 이날 대장간을 찾은 단골 황성진(49·청주시 분평동)씨는 “시중에 파는 부엌칼은 몇 개월을 쓰면 날이 무뎌지는 데 최씨의 칼은 3년 동안 날을 갈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치켜세웠다.

대장간은 100㎡ 정도 넓이로 제법 큰 규모였다. 하지만 화덕이 있는 한 평(3.3㎡)의 작업공간 외엔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수십 년째 대장간을 밝히고 있는 화덕 주변에는 크고 작은 망치, 집게 등 각종 연장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가 만든 호미, 낫, 괭이, 쇠스랑 등 수천 개의 전통 농기구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부엌칼과 과도, 약초 채취용 괭이, 정글도, 엿장수 가위 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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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진씨가 낫 끝을 달군 뒤 나무 자루에 꽂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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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대장간에서 판매하는 칼과 농기구 등에는 손잡이에 '장인 최용진'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최씨는 "제품에 자신있다는 보증이자 칼 한자루도 허투로 만들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라고 설명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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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퇴·월도 등 사극 등장 철기류 만든 진짜 장인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TV에도 등장했다. 2004∼2005년 큰 인기를 끌었던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한 철퇴, 포졸들이 쓰던 삼지창, 망나니 칼, 월도, 화포 장식품 등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최씨는 “1500여 년 전 백제왕이 일왕에 하사했다는 칠지도(七支刀)는 한 방송사 PD의 부탁을 받고 옛 방식으로 제작 과정을 시연하기도 했다”며 “지금은 자취를 감춘 연탄집게와 공사판에서 쓰는 벽돌 집는 도구, 각종 연장도 손님들이 필요로 하면 그때그때 만들어 준다”고 말했다.

최씨가 대장장이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6세 때 고향인 충북 괴산 청천에서 대장간 일을 하면서다. 그는 “어렸을 때는 집에 라디오와 재봉틀, 괘종시계가 있을 만큼 잘 살았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며 “밥은 굶지 않겠다 싶어 대장간 허드렛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4년 가까이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다 스무살이 되던 해 충주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매형에게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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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진 장인은 칠지도와 월도, 철퇴 등 TV 사극에서 쓰던 무기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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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진 장인이 자신이 만든 작품을 들고 대장간을 소개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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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군에 대장간을 차린 건 1974년이다. 증평 내에서 다섯 차례 자리를 옮긴 뒤 장뜰시장 안에서 20년째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다. 최씨는 “보통 대장간은 호미나 낫 등 전통 농기구를 단품으로 취급하는 곳이 많지만, 매형은 쇠로 된 온갖 도구를 만드는 만능 대장장이였다”며 “매형 밑에서 3년쯤 일하자 10년을 배운 인근 기술자보다 기술도 뛰어나고 작업 속도도 2배 이상 빨라졌다”고 말했다.

44년 동안 대장간을 지켜온 그는 “쇠를 만지는 게 늘 즐겁다”고 했다. 최씨는 “농촌이 기계화 됐어도 사람 손으로 직접 만들어 사용해야 하는 기구들이 아직 많다”며 “사라져 가는 전통 농기구를 복원하고, 옛 방식의 대장간 명맥을 잇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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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진 장인이 만든 '키속의 우리 연장'. 2005년 충북 공예상품 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았다. 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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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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