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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금지구역 없는 미·러 정찰 비행, 폐기 수순 밟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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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영공 개방 조약’

탈냉전 시대 신뢰 구축 조치…가입국끼리 항공 정찰 보장

트럼프, 내년 관련 예산 동결…러와 갈등 빚어 ‘조약’ 기로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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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악관 상공은 자국 항공기도 날 수 없는 비행금지 구역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찰기 투폴레프(Tu-154)는 지난해 8월 백악관 상공을 ‘합법적’으로 날아다녔다. 국방부, 의회는 물론 중앙정보국(CIA) 본부 상공까지 누볐다.

이는 ‘영공 개방 조약’ 때문이다. 서로 간의 비무장 항공 정찰을 허용하는 이 조약은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 동서 진영 34개국을 가입국으로 두고 있다. 이 때문에 “군사 활동에 대한 개방성과 투명성을 증진하려는 가장 광범위한 국제적 노력”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미국이 관련 예산을 동결하면서 폐기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 국가 안보도 거부 이유 안돼

해당 조약의 목적은 가입국끼리 항공 정찰을 통해 국제 기준과 합의에 맞게 무기가 운용되고 있는지를 상호 감시하는 것이다. 본토와 부속도서, 영해 등 모든 지역에서 군기지를 포함한 모든 시설물을 정찰할 수 있다. 단 사전에 정찰 일시와 횟수, 지역 등을 정찰 대상국에 알려야 한다. 대상국은 ‘안전에 대한 우려’가 있을 경우에만 요청을 거부할 수 있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는 거부할 수 없다.

정찰기는 정찰 대상국으로부터 항로 등에서 우선권을 부여받는다. 이른바 ‘택시 옵션’을 통해 정찰 대상국이 아예 정찰기까지 제공할 수도 있다. 사진은 물론 영상 촬영도 허용되며 장비의 성능은 상공에서 지상의 트럭과 전차를 구분할 정도까지 허용된다. 야간 정찰을 위한 적외선 장비, 기상 악화를 대비한 특정 레이더 장비도 사용할 수 있다. 정찰을 통해 입수한 사진과 영상은 다른 가입국에도 공유된다.

해당 조약은 1955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처음 제안했으나 구소련의 거부로 무산됐다. 1989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탈냉전을 위한 신뢰 구축 조치의 일환으로 다시 제안했고, 캐나다와 헝가리 주도로 재협상이 추진됐다. 1992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WTO) 회원국들이 모여 이 조약에 서명했고, 2001년 러시아가 가입한 뒤 2002년부터 발효됐다. 발효 첫해 67회의 정찰 비행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약 1200회 정찰 비행이 이뤄졌다.

■ “조약이 동결됐다”

그러나 조약은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은 ‘2019년 국방수권법’에 해당 조약과 관련한 활동에 예산 지원을 중단하는 내용을 담았다. “대통령이 러시아에 대해 과거 조약 위반 행위에 대한 제재를 가하고 이를 의회에 보고하기 전까지는 예산이 복구되지 않을 것”이라는 단서도 담겼다.

러시아의 과거 조약 위반은 지난해 6월 러시아가 발트해 칼리닌그라드의 한 통제 구역에 대한 미국의 정찰 요청을 거부한 것을 말한다. 해당 지역은 핵 저장시설이 들어선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러시아와 조지아 간 접경 지역에 대한 정찰 역시 거부됐다. 미국 측은 조약 위반이라 비난했고, 보복 조치로 올 1월부터 러시아의 정찰 요청을 전면 거부했다. 또 러시아 정찰기의 관측 장비가 조약이 정한 기준을 넘어설 정도로 고도화됐다며 “사실상의 간첩 행위”라는 비난도 쏟아냈다.

반면 러시아 연방의회 외교위원회의 블라디미르 다르자로프 부위원장은 “이는 미국이 새로운 군비 경쟁을 위한 모든 준비를 숨기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매체 스푸트니크뉴스는 “조약이 동결됐다”고 표현했다. 일각에서는 정찰위성 자산에서 러시아를 앞서는 미국이 이 조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분석도 있다. 조약이 폐기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이 조약은 군비 경쟁을 완화하려는 목적에서도 추진됐다. 냉전 당시 정보 부족으로 상대의 무기가 과대 평가되면서 더 강한 대응 무기를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미국의 F-15 전투기도 당시 소련의 신형 미그기에 대한 서방의 공포심 때문에 개발이 시작됐다. 조약은 ‘있는 그대로 보여줄 테니 안심하라’는 취지로 추진됐고 체결됐다. 최근 중국, 러시아, 미국이 앞다퉈 신형 핵무기와 극초음속 무기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조약은 동결된 채 잠자고 있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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