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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성추행 피해 고통의 3년…“변호사도 국가도 내 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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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성폭력 피해자 ‘아물지 않은 상처’

일본계 은행 입사 2년만에

상사가 회식 뒤 성추행

용기 내 변호사에 의뢰했는데

허락 없이 방송촬영 주선하고

“아무것도 아니다” 합의 종용도

회사에선 ‘꽃뱀’ 헛소문 돌고

언론 인터뷰 한 동료 색출작업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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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9일.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 통신망인 ‘이프로스’에 7년 전 상사에게 성추행당한 사실을 알리는 글을 올려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의 문을 열었다. 그날 저녁에는 방송에 출연해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한테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곳곳에서는 ‘미투’라는 이름의 고발이 이어졌다. 그중에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도 있었다. 그 역시 방송에 나와 안 전 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했다. 지난 14일 법원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현행법의 한계라는 주장과 잘못된 판결이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하지만 엇갈리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용기를 낸 순간, 고통은 새롭게 시작된다.

강민희(가명·32)씨 역시 그랬다. 그는 2013년 일본계 ㅁ은행 서울지점에 입사했다. 입사 2년만인 2015년 4월9일 밤 11시, 그는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택시 안에서 일본인 상사 ㅇ에게 강제추행을 당했다. ㅇ은 그의 허벅지 안으로 손을 밀어넣고 강제로 입을 맞추려 들었다. 고통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은 상처를 치유해주지 않았다. 강씨는 매일 새로운 상처를 떠안은 채 살아남아야 했다. <한겨레>는 사건이 있었던 3년 전부터 강씨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지난 5월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의 인터뷰를 비롯해 수차례 전화로 그날 이후 그의 삶에 관해 묻고 들었다. 강씨는 이 순간 또 어디에서 고통받고 있을 피해자에게 “힘을 내라”고 전하고 싶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변호사마저 내 편이 아니었다” 신혼 6개월이었다. 2015년 4월9일, 평소 불쾌한 음담패설을 남발하던 일본인 상사 ㅇ이 마련한 회식이 있었다. 불편한 자리가 끝날 무렵 집으로 가는 길에 ㅇ은 회식에 참여한 팀원들을 택시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강씨의 업무를 지도하고, 팀장에게 강씨에 대한 평가 의견을 제시하는 등 감독자의 지위’(1심 판결문)에 있었던 상사였다. 그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다. 택시가 팀원 한 명을 집 근처에 내려주고 강씨의 집을 향하는 동안 ㅇ은 “한 번 안아 봐도 돼?”라고 말하며 강씨를 강제로 껴안는 등 강제추행을 했다.

이 충격으로 강씨는 4월15일 응급실을 찾았고 같은 달 28일 병원에 입원했다. 두통에 하혈까지 잇따랐다. 홀로 속으로 삭여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사와 다툴 엄두가 쉽게 나지 않았다. 자신의 심경을 잘 이해해 줄 변호사를 고르고 골라 사건을 의뢰했다. 신뢰는 상처로 되돌아 왔다.

강씨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노동부 근로감독관이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장을 이 자리에 동석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사무장이라고 말한 사람은 사실 언론사 피디(PD)였다. 피해자의 동의 없이 근로감독관과 만나는 과정을 몰래 촬영하려 했다. 강씨는 더 이상 변호사를 믿을 수 없었다.

여성계에서 유명한 다른 변호사를 찾았다. 하지만 그 변호사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빨리 합의하는 게 낫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강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었지만, 이 변호사에게는 그저 그런 사건이었다. “피해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봐주는 변호사를 원했어요. 제 심정을 이해해주고 법리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그런 사람을 찾는 건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는 자신을 변호해주는 변호사 구하는 과정에서부터 벼랑을 만난 듯했다.

응원은 어렵고, 2차 가해는 쉬웠다 강씨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회사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제가 2억원을 받고 합의했대요. 꽃뱀이었다고.” 회사에서는 구경도 못 해 본 돈을 강씨가 받았다는 말이 퍼졌다. 강씨는 사건 이후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급성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아 2015년 4월28일부터 다음달 22일까지 입원 치료를 받았고, 같은 해 5월28일에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까지 받았다.

그날의 충격으로 아직도 일상생활이 어렵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못 가요. 한 번은 큰마음 먹고 마트를 갔어요. 하필 비 오는 날이었는데 사람들이 장우산을 들고 다녔어요. 자꾸 그걸로 누군가 저를 찌를 것 같은 거예요. 가족들과 함께가 아니면 밖을 나갈 수가 없어요. 수면 장애로 불면증도 심하고, 잠이 들어도 사람들에게 쫓기는 꿈을 꿔요.”

하지만 회사 동료들은 피해자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당연한 일에도 용기를 내지 못했다. “단지 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의 성차별적인 구조가 문제였어요. 그래서 제 사건과 관련해 용기를 내 언론 인터뷰에 나선 분들도 있는데, 회사 쪽에서 그분들을 색출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응원의 목소리는 듣기 어려웠지만, 2차 가해는 너무 쉽게 강씨에게 접근했다.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ㅇ쪽은 강씨를 ‘꽃뱀’으로 취급했다. 그 흔적은 판결문에도 남아있다. “ㅇ은 추행 행위를 했을 리가 없다는 등의 변명으로 일관함은 물론, 피해자가 거액의 금품을 노리고 무고를 하였다고 진술하는 등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하지 않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인에게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하지 않을 수 없다.”(1심 판결문)

강씨는 지난 3년간 이런 2차 가해를 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회사 쪽에서 자꾸만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고 시도했고 직원들 사이에 헛소문과 억측이 돌아 괴로웠어요. 법정에서 ‘꽃뱀’이나 ‘거짓말쟁이’라는 비난받을 땐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사실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직접 나서야 했어요.”

숱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강씨는 형사와 민사 법정에서, 또 근로복지공단에서 지금껏 모두 이겼다. 2016년 5월19일 서울서부지법은 ㅇ의 강제추행치상 혐의를 인정해 징역 2년6월을 선고하고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강씨는 ㅇ과 회사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1심에서도 이겼다. 앞선 2016년 10월 강씨는 사건 이후 입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산업재해로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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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피해자를 돕지 않았다 강씨가 적지않은 변호사 비용에 써가며 홀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국가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강씨는 의지할 곳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사측에 탄원서를 보내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별다른 조처가 없었다. 고용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나마 부여잡을 지푸라기였다. 하지만 지푸라기는 맥없이 끊겼다.

강씨는 사건이 일어난 2015년 4월 노동부에 성추행 사건과 함께 성희롱과 성차별이 만연한 사내 문화에 대해 진정했다. ㅇ의 사건뿐 아니라 평소 직장에서 있었던 기획팀장 ㄱ, 부지점장 ㄴ, 지점장 ㄷ씨가 성희롱을 일삼는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노동부의 조처는 미온적이었다. 노동부는 2015년 10월12일부터 14일까지 강씨의 회사 여직원을 상대로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여부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한겨레>가 이 설문조사 응답지 전문을 입수한 결과 70명 중 18명이 성희롱을 당했다고 답변했다. 노동부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더라도 “설문조사 결과 7건의 성희롱 피해 사례를 확인”을 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에 대한 조처는 “2015년 10월27일 직장 내 성희롱 재발방지를 위한 개선 계획 제출 요구”를 한 것이 전부였다. 고발이나 수사 의뢰 등의 조처는 없었다.

강씨가 진정한 “ㄱ, ㄴ, ㄷ에 대해서는 진정인의 주장 외 직장 내 성희롱 사실을 입증할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라고 답변했다. 또 “ㅇ은 징계해고 되었고(시정지시 실익 없음), ㄱ, ㄴ, ㄷ은 법위반 확인 불가로 행정종결”했다고 밝혔다. 강씨가 진정을 한 뒤 노동부가 회사에 준 불이익은 ‘성희롱 예방 교육 미흡’ 등 노동관계법 위반사항 6건을 찾아 시정지시 및 과태료를 부과한 것이 전부였다.

비슷한 시기 진정을 넣었던 인권위의 조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이 많다’ ‘담당자가 바뀌었다’ 등의 이유로 강씨의 사건 처리는 계속 늦춰졌다. 지난해 12월 뒤늦게 통지된 처리 결과도 실망스러웠다. 인권위는 ㅇ과 이 회사의 서울지점장에 대해서는 형사 및 민사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강씨에 대한 구제가 이뤄졌다고 보고 진정을 각하했다. 의지할 곳 없었던 강씨는 그렇게 홀로 여기까지 왔다.

용기 내라고 전하고 싶다 그에게 큰 짐을 진 채 계속 싸우는 이유를 물었다. “그래야지 다른 사람이 덜 다칠 수 있으니까요.” 대답은 간단했다. “저보다 먼저 성폭력 피해를 보고 싸워 온 분들을 만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 경험을 알리는 것이 다른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당신에겐 잘못이 없다. 많은 사람이 응원한다.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말아 달라.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강씨가 지금 이 말을 가장 전하고 싶은 사람은 김지은씨다. “김지은씨가 지금 얼마나 힘들지 잘 알기 때문에 많이 걱정돼요. 하지만 응원하는 사람이 많으니 꼭 힘내서 진실을 밝히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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