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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해외 우리 문화재 바로알기] 이토 히로부미, 고려청자 ‘싹쓸이’ 수집해 日 왕실에 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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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고미술품 약탈한 일본인들 / ‘고려청자광’ 불리며 1000여점 모아 / 103점 日에 반출했다 1966년 반환 / 차관 출신 고미야 유물 226점 소장 / ‘조선 수산왕’ 가시이는 1241점 수집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고미술품을 수집한 일본인 수장가는 조선총독부 고관에서 학자, 교육자, 사업가, 애호가에 이르는 여러 직종과 직업에 분포되어 있으며 수집 품목도 고려청자, 조선백자, 조각, 서적, 민예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고려청자 최대 수집가로 유명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까지 올랐으나 고미술품 횡령 혐의로 체포된 모로가 히데오, 도굴에 가까운 발굴로 많은 백제 유물을 모은 공주고보 교사 가루베 지온 등이 있는가 하면 아사카와 노리다카·아사카와 다쿠미 형제, 야나기 무네요시처럼 조선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인 이들도 있다. 한편 지역사회에 기여를 하고 전통공예의 산업화를 위해 노력한 도미타 기사쿠 같은 사업가도 있고 한국 고고학과 관련된 연구와 취미 보급을 목적으로 한 부산고고회와 같은 공부모임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수장가들의 유형은 스펙트럼이 넓다.

조선미술품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인 근대 일본인 수장가를 통해 근대 일본에서 이미 조선 미술품에 대한 취미와 애호하는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 수장가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품목은 조선시대 도자기로 1920년대 및 193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도 컬트(특정 대상에 열광하는 문화적 현상)에 가까운 지속적인 추앙을 받고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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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와 ‘어린’ 영친왕… 일제의 교묘한 연출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 이은의 사진. 할아버지(어른) 같은 이토 히로부미와 손자(미성년) 같은 영친왕을 대비시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드러내려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청자에 열광해 많은 작품을 반출한 인물이다.


◆‘고려청자광’ 이토 히로부미, 일제 관료들의 수집

식민지 조선의 지배를 위한 관리의 수효와 비중이 컸기 때문에 일본인 수장가 가운데에는 특히 조선총독부 고관이나 관리가 많았다. 1910년 8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인 관리와 임시직원이 대폭 증원되어, 1911년 3월 말에 이미 고등관(高等官)과 하위직인 판임관(判任官)만 5113명에 달했다. 경찰관과 군인 등까지 포함하면 식민통치와 연관된 일본인들의 수는 훨씬 늘어난다.

조선총독부 고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조선 미술품 수장가는 이토 히로부미이다.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으로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3월 통감에 취임한 이후 고려청자 수집에 진력하여 1000여 점이 넘는 고려청자를 수집했다고 전한다. 그가 반출한 도자기 중 우수한 103점은 일본 왕실에 헌상되었다가 1966년 한·일회담 때 우리나라로 반환되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 다음으로는 한일합병 이후에 이왕직 차관 등을 지낸 고미야 미호마쓰가 꼽힌다. 이왕가박물관 설립에 관여하면서 우수한 미술품을 많이 수집한 고미야 미호마쓰의 소장품은 사후 1년 뒤인 1936년에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개최된 경매회에 출품되었는데 중국, 일본, 우리나라의 수준 높은 유물 226점이 나왔다.

법관을 지낸 아사미 린타로는 희귀본과 유일본이 많이 포함된 방대한 서적류를 수집했다. 아사미 린타로가 수집한 서적류는 일본으로 건너가 미쓰이 재벌의 ‘미쓰이 문고’라고 불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미군정의 재벌 철폐 선언에 따라 미국에 팔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아사미 문고’가 되었다. 주한 공사를 지낸 하야시 곤스케, 미야자와 도센 등의 고관도 조선의 고미술품을 많이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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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판 돈으로 미술품 사들인 日人 1895년 조선에 건너와 담배 사업으로 굴지의 실업가가 된 다카기 도쿠야(오른쪽)는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불상, 회화 등을 수집했다.


◆한국문화재에 열광한 ‘추사 연구자’, ‘조선의 수산왕’

일본인 학자나 교원으로는 아유카이 후사노신, 세키노 다다시(1868∼1935),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 아사카와 형제, 야나기 무네요시, 노미즈 겐 등이 알려져 있다.

아유카이 후사노신은 언어학자이자 사학자로서 조선총독부의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위원을 지냈고,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세키노 다다시는 조선총독부의 위촉에 의해 한반도와 중국의 고건축과 미술을 조사했다. 두 사람은 일제의 통치와 연관된 관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후지쓰카 지카시는 최고의 추사 김정희 연구자로 유명하고,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간의 학자이자 애호가로서 도자 등 민예품 수집으로 유명했다. 이들은 학문적 연구와 개인적 관심으로 한국의 고미술품을 수집하였고, 특히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민예 사랑은 지금도 회자된다.

미야케 조사쿠, 모리 고이치, 이토 마키오 등 은행가들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모리 고이치는 일제강점기 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 두취(은행장)를 지낸 인물로 소장품 가운데 1936년 11월 경성미술구락부의 경매회에 출품된 후 치열한 경쟁 끝에 전형필에 낙찰된 국보 제294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白磁靑畵鐵彩銅彩草蟲文甁)은 우리에게 친숙한 문화재이다.

지방의 대표적인 일본인 고미술품 수집가는 기업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평양의 시바타 레이와 나카무라 신자부로, 평안남도 진남포의 도미타 기사쿠, 원산의 미요시, 대구의 오구라 다케노스케(1870∼1964), 이치다 지로, 시라카미 주키치, 부산의 가시이 겐타로, 군산의 미야자키, 인천의 스즈다케, 충남 성환의 아카보시 고로 등이 대표적이다. ‘부산의 3대 거두’ 중 한 명이자 ‘조선의 수산왕’으로 꼽히는 가시이 겐타로가 부산박물관 건립을 위해 자신이 수집한 고미술품 1241점을 1934년 도쿄미술구락부 경매회에 출품한 사실은 당시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인 수장가들의 위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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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이 지킨 국보 294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국보 294호)은 일제강점기에 은행장을 지낸 모리 고이치의 소장품이었다가 1936년 11월 열린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전형필에 낙찰된 이력을 갖고 있다.


◆하층민에서 기업가로… 벼락출세한 일본인 수집가들

조선에서 성공한 일본인 사업가들은 대부분 그들의 조국 일본에서는 경제적 지위나 사회적 신분이 높지 않았고, ‘신천지 조선’에 자신의 명운을 걸었던 하층민들이 많았다. 일본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위와 기회를 결코 가질 수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 조선에서 성공하여 실력자가 되었다. ‘기회의 땅’ 식민지 조선에 와서 성공을 거머쥠과 동시에 미술품 수집가로도 이름을 알린 도미타 기사쿠, 다카기 도쿠야, 오구라 다케노스케 등은 일본에 있었다면 하층민의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을 인물들이다.

효고현 촌장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몰락하여 도자기 견습공, 광산 노동자 등을 전전하던 도미타 기사쿠는 1899년에 조선으로 건너온 후 은율광산, 농장 등의 경영에 성공하여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화고려자기공장, 조선미술품제작소를 설립하는 등 전통 공예산업의 현대화에 관심을 쏟았다. 1921년에는 경성 남대문 근처의 도미타 상회에 조선미술공예관을 세워 신구 공예품을 수집하여 진열하다 재정 악화 때문에 1926년에 일본의 세계적인 골동상 야마나카 상회에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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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장


기후현 빈농의 자식인 다카기 도쿠야는 소학교를 겨우 마친 후 신발 등 잡화상을 전전하다 1895년에 조선으로 건너와서 고미술상, 담배상으로 성공한 후 경성에서 조선전매연초유통회사를 창립하는 등 굴지의 실업가가 되었다. 1936년 금혼식을 맞이하여 중국 청동기·옥기에서 삼국시대 불상, 조선시대 회화, 일본도에 이르는 고미술품 235점을 수록한 ‘금혼식목록’을 간행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했으나 아버지의 국회의원 낙선과 사업 실패, 아버지가 관여한 수뢰사건에 대해 위증한 혐의로 체포·수감된 것 등이 겹쳐 파탄에 이른 상태였다. 훗날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당시를 회고하며 조선에 온 이유는 오로지 “오구라 집안의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고 술회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고리대금업, 부동산 투기를 거쳐 전기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대구 굴지의 재산가가 되었고, 1920년 무렵부터 고미술품 수집에 골몰했다.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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