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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왜냐면] ‘미스터 션샤인’과 구한말 한미관계 왜곡 / 최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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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최형익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세간의 화제인 모양이다. 우연히 미군과 일본군이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구한말 어느 시기를 다루고 있기에 저런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구한말의 국제정세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발생할 수 없다. 더구나 이 작품이 다루는 1900년대 초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국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 원래 미국의 대조선 외교원칙은 중립과 불간섭주의였지만 루스벨트 행정부 들어 친일로 급격히 기울었다. 왜냐하면, 만주지역에서의 러시아의 팽창을 일본이 나서서 막아주기를 내심 바랐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미군과 일본군이 백주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총을 겨누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구한말의 한미관계를 심각할 정도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미 해병대 대위가 공사대리로 근무한다는 설정 자체가 불가능한 노릇이다. 미국은 외교관계를 수립한 동양 3국의 공관에 주재시키기 위해 해병대 소속 군인을 파견한 전례가 없다. 다만, 공사관의 무관으로 유일하게 조선에 파견한 인물이 미 해군 소속의 조지 클레이턴 포크 소위였다.

작가 역시 포크 소위를 염두에 두고 드라마의 유진 초이 대위를 형상화한 듯하다. 두 사람 모두 대리공사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 배경은 전혀 다르다. 포크는 1883년 가을에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 등 조선의 보빙사절을 경호하다가 그들을 따라서 서울에 들어왔다. 포크 소위의 조선에서의 삶은 그 나름 파란만장했다.

드라마에서는 일본과 대립하는 걸로 그려지지만 포크 소위의 최대 라이벌은 청나라에서 조선의 내정간섭을 위해 파견한 원세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일전쟁 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정치, 군사, 대외관계는 대부분이 청나라 재가를 받아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크는 1884년 6월 대리공사로 취임한 때부터 1887년 6월 퇴임할 때까지 자국 훈령에 구애받지 않고 조선의 자주권을 옹호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더 기막힌 건 포크 소위가 대리공사 직무를 2년씩이나 맡게 된 사연이다. 초대 공사였던 루셔스 푸트가 봉급이 너무 적고 직위가 격하된 것에 항의해 휴가를 핑계로 귀국했기 때문이다. 당시 주한 미국공사관은 서기 한명 고용할 돈이 없어 모든 사무를 박봉의 공사가 처리해야 할 정도였다.

20세기 초반, 미국은 일반 국민들은 점차 잘살게 되었지만 행정부 예산은 의회의 철저한 통제로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국무성 외교부 역시 제 역할을 못했고 직업 외교관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알렌이 의사 생활을 하다가 공사로 임명된 것 역시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따라서 드라마에서처럼 해병대 장교가 고급 호텔에서 묵으며 대리공사로 생활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작가는 세계 2차대전 이후에나 가능했을 법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이미지를 이제 갓 세계열강으로 부상하던 세기의 전환기에 덧칠했다. 있지도 않은 일, 아니 보다 정확히 실제 역사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일을 작가적 상상력에만 의존해서 그려내는 것은 중대한 역사왜곡이다.

다른 건 몰라도 ‘미스터 션샤인’이 그려내던 시기 무렵, 미국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협정에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을사조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05년 11월24일, 주한 공사관을 철수해 가장 먼저 조선과 단교했다는 사실만은 반드시 기억해두자.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나라에 국제관계란 이렇게 비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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