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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최보식이 만난 사람] “이렇게 나서도 괜찮은 건가, 정부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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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환익 前 한전 사장

한전이 영국 원전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작년 12월 6일, 그날 밤에 조환익(67) 사장은 사임했다. 임기는 석 달이 남았지만 박수 칠 때 떠났던 셈이다.

하지만 최근 한전은 영국 원전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잃었다. 영국 가디언지(紙)는 "한국 정부의 교체와 한전의 새 사장 임명으로 불확실성이 생겼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조환익씨는 "협상 위해 영국에 도착한 다음 날 어머니 부음을 듣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고 말했다.


―당신이 떠나고 난 뒤 '탈원전' 분위기에서 어느 누가 적극 앞장섰겠나?

"솔직히 나도 영국 정부와 협상하면서 걱정은 됐다. 이렇게 나서도 괜찮은 건가, 정부에서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했다. 하루 지나서 전화가 왔다. '적극적으로 하라'고 했다."

―우리가 22조원의 투자를 해서 원전을 건설한 뒤 직접 운영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라,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지적이 있었다.

"우리가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에 원전을 짓는다는 것은 상징성이 있었다. 향후 건설이 예정된 60여 기(基)의 원전 시장에 뛰어드는 데 교두보가 될 수도 있었다. 사실 리스크를 따지면, 모래 폭풍이 몰아치는 UAE 원전 수주도 만만찮았다. 그런 곳에 원전을 건설한 적이 없었다. 원전에 모래가 들어가면 멈춰야 하는데 그걸 우리가 책임져야 했다."

―영국 원전 협상은 언제 시작됐나?

"내가 원전 수주를 위해 영국에 처음 간 것은 4년 전이었다. 영국의 담당 차관으로부터 '한국은 우리와 신뢰 관계가 전무하지 않으냐'는 식으로 모욕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그 뒤로 끊임없이 공을 들였다. 한번은 협상을 위해 영국에 도착한 다음 날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그때 2년 반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당시 어떻게 해서 우선협상자 지위를 얻게 됐나?

"UAE에 원전을 건설한 실적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영국과의 최종 협상 때 사진 세 장을 보여줬다. 건설 중인 UAE 원전과 디지털화된 원전의 주조종실, 헬멧과 작업복 차림으로 현장을 지휘하는 내 모습이었다. 이런 사진도 효과가 있었고, 또 영국의 협상 상대 중에는 우리가 짓고 있는 UAE 원전의 건설 업체와 관련된 이가 있었다."

―그렇게 따낸 우선협상자의 지위를 잃게 됐는데.

"협상자 지위는 보장한다고 했으니 꼭 비관적은 아니라고 본다. 설계·시공·건설·기자재에서 우리는 톱 수준이다."

―한국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보지는 않나?

"탈원전 정책이 해외 원전 수주에 치명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원전을 활발하게 짓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 등 경쟁사와 비교해 구체적 조건 협상에 들어갔을 때 불리할 수는 있다. 영국 입장에서는 신규 원전을 60년간 돌려야 하는데 한국에서의 전문 인력과 원전 부품 공급이 지속 가능할까, 원전의 운영·유지·보수가 제대로 될까 하는 우려는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안전' 때문에 원전을 못 짓겠다면서 해외에는 팔겠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안 될까? 우리가 영국 입장이라면 그런 나라의 원전을 선뜻 받아들일 수 있겠나?

"정서적으로 그런 면이 있지만 수주 경쟁에서 치명적은 아니다. 적어도 나와 협상할 때는 한 번도 탈원전 문제를 꺼낸 적이 없었다."

―면전에서 문제를 안 삼았다고 통과됐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신이 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중단이 있었다. 어떤 입장이었나?

"짓고 있는 원전을 중단하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현 정권이 60년 뒤에 '원전 제로(zero)'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현실성 있는지도 의문이다. 퇴임 직전 국회 상임위에서 야당 의원으로부터 '현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느냐'며 질책성 질문을 받았을 때 '인수위 관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을 만나 탈원전에 대해 우려스럽다는 얘기를 했다'고 답했다."

―얼마 전에는 월성 1호기의 조기 폐쇄가 발표됐다. 이미 7000억원을 들여 부품을 교체하고 보수해놓은 원전이었다. 서민들은 살기 어렵다고 난리인데, 현 정부만 이렇게 돈을 허공에 날릴 만큼 넘쳐나는가 싶었다.

"나는 원전을 계속 많이 지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렇게 돈을 들여 보수해놓은 월성 1호를 조기 폐쇄하면서 '경제성'을 이유로 댄 것은 정말 납득이 안 됐다."

―요즘 한전의 시가총액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시점과 비교해 8조원가량 증발했다. 최근 3분기 연속으로 영업 적자(합계 9500억원)가 났다.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한전은 너무 돈을 많이 벌어 세간에서 불만이 나왔을 정도로 최우량 기업이었는데.

"솔직히 작년 말 퇴임하면서 '탈원전을 해도 금년에는 적자는 안 될 것'으로 내다봤다. 고유가 등 연료비 단가와 환율 등에서 변수가 있었고, 원전의 예방 정비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원전의 값싼 전력 대신 다른 발전 형태의 비싼 전기를 한전이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조선일보

2016년 UAE 원전 건설 현장에서.


―국내 원전 24기 중 11기가 어느 시점 동시에 가동을 멈추고 있었다고 한다. 정례적으로 예방 정비를 해야 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하고 그 기간이 길어진 적은 지금껏 없었다. 폭염에 전력난 문제가 대두되자 정부는 '과거에 건설한 원전에서 부실시공 등 문제가 발견돼 정비 기간이 늘어났다'고 해명했는데?

"내가 구체적 자료를 안 본 이상 답변할 입장은 아니다. 당초에 '판도라' 같은 영화를 보고 탈원전을 하겠다는 것은 비과학적 태도였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영향을 받아 원전 건설을 중단하는 것도 지나친 면이 있다."

―원전 문제는 전기 요금 문제로 연결된다. 이번 폭염 동안 서민 가정에서는 전기 요금 폭탄 때문에 에어컨을 켜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정부가 선심 베풀 듯 전기료를 몇푼 깎아주는 식으로 계속해야 하나? 가정용 전기에만 적용되는 '누진제'는 폐지해야 하지 않는가?

"당초 누진제는 전기를 적게 쓰는 저소득층 가구에 전기 요금을 낮춰줘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취지였다. 지금은 방방마다 에어컨을 틀고 있고 이는 삶의 질과 인권 문제가 됐다. 누진제 폐지만 아니라 전기 요금 체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 산업용·일반용·주택용으로 나눠진 종별 원가제를 '전압별 체제'나 '연료비 원가 연동제' '선택요금제' 등으로 바꿔야 한다. 또 한전의 적자를 막으려면 전기 요금도 인상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값싼 전기의 혜택을 누리면서 탈원전을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 아닌가?

"물론 그렇지만 경제성·효율성만이 잣대가 돼서는 안 된다. 사실 원전을 계속 늘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원전 안에 저장돼 쌓이고 있는 방사성폐기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거의 포화 상태다. 아궁이의 재를 처리해야 한다. 또 원전의 경우에는 대규모 발전용량으로 초고압 송전탑을 세울 수밖에 없다. 밀양 사태에서 경험했듯이 저항이 심하다."

―이 점에 동의한다. 사실 원전 찬성론자 누구도 이런 사회 갈등 비용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산자부 차관 시절 경주와 군산의 방폐장 후보지를 다니면서 곤욕을 치렀다. 한전 사장이 된 뒤에는 밀양에서 또 겪었다. 개인적으로 원전을 무한정 계속 짓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회의적이다. 탈원전도 비현실적이지만, 사회적 갈등으로 터져 나올 방폐장과 송전선 문제에 대책 없이 전기 요금이 싸니까 원전을 짓자는 주장도 공허하게 들릴 때가 있다."

―솔직히 딜레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원전이 아니면 갈수록 늘어나는 전력 수요에 맞출 수가 없다. 원전을 서서히 줄이면 몰라도 쓸 수 있는 원전을 조기 폐쇄하고 계획된 원전 6기를 백지화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원료 단가가 원전의 두 배 이상 되는 LNG(천연액화가스) 발전이 대안이 된다고 보나?

"LNG 발전이나 신재생에너지는 이산화탄소 감축 때문에 늘려야 하는 것이고, 전력 위기 때의 예비 백업용이다. 지금으로서는 신재생은 값싼 에너지가 아니고 난개발 등으로 환경을 훼손하는 면도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있는가?

"가장 싸고 쉽게 공급할 수 있는 원전의 역할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전력 문제를 국내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것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원전을 더 지어 해결하기보다 외국에서 수입할 수 있다. 유럽 각국에서는 서로 전기를 사고파는데, 한·중·일만 안 하고 있다. 재작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함께 몽골에 태양광과 풍력발전소를 세워 전기를 만들어 수출하는 사업 계획을 세웠다. 몽골은 전기 1㎾당 2~3센트, 한국은 8~9센트, 일본 14센트다. 몽골 정권이 바뀌면서 이 계획이 유보됐다."

―북한이 막고 있는데 송전선 설치는?

"해저 케이블을 깔면 된다. 러시아의 전력은 동해로, 중국은 서해로 들어올 수 있다."

―한전은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밀양 송전탑을 지하로 매설하지 않았는데, 해저 케이블 설치 비용은?

"산악 지역에 지하 매설은 기술적으로도 어렵지만 해저에는 가능하다. 6~7년이면 비용도 회수할 수 있다. 현재 제주도에서 사용하는 전력의 일부는 진도에서 4개 해저 케이블로 공급하고 있다."

그는 산업부 차관 출신으로 2012년 말 한전 사장이 된 뒤로 연임했다.

―사장 임기 종료를 3개월 앞두고 굳이 사퇴한 것은 압박 때문이었나?

“압박을 많이 받지는 않았다. 5년간의 사장 재임 시절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세 번 한전 본사가 있는 전남 나주에서 서울을 나들이했다. 모든 갈등 현장에 가야 했다. 무박 3일의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고, 시도 때도 없이 국회에 불려 다녔다.”

[최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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