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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수술대 오른 국민연금] 노후소득 보장 논의 빠진 채… '기금 고갈' 불안감만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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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민연금, 왜 못 믿게 됐나

현행법상 정부가 수급권 보장하지만/ 지급 보장의 의미와 한계 모호 불만/‘수급 연령 돼도 못 받을 수 있다’ 우려/ 국가의 적자 보전 천명으로 풀어야

정권마다 공약 재원에 사용 반발 불러/ 기금수익률 저하 “원금 잃나” 우려도/ 공무원연금·군인연금과 차이도 문제/ 가입기간·보험료 동일해도 적게 받아

세계일보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을 위해 도입된 국민연금제도가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연금 4차 재정추계 결과 발표에 앞서 “국민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국민연금 개편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현재 연금제도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땅에 떨어진 신뢰 수준을 보면 합리적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저부담-고급여’로 설계된 국민연금은 애초에 지속 불가능한 형태로 출발했다. 1988년 제도 도입 때 참여한 초기 가입자는 고작 임금의 3%를 보험료로 내고 생애 평균임금의 70%를 돌려받게 돼 있었다. 그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구조인 데다 인구 고령화까지 겹쳐 연금개혁은 불가피했다.

이후 1998년 1차 연금개혁 때 동원된 논리가 ‘기금 고갈론’이다. “보험료를 더 내면 국가가 책임지고 노후소득을 보장하겠다”가 아니라 “고갈을 막으려면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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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2001년 공공자금관리기본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국민연금 기금을 저리로 가져다 썼다. 1994∼2000년 정부가 ‘공공자금 강제예탁’이라는 명목으로 연기금을 저렴하게 빌려간 뒤 끝내 갚지 않은 돈만 2조원에 이른다. 기금고갈 공포에 정부의 전횡까지 겹치며 한국인에게 국민연금은 ‘언젠가 없어질 정부 쌈짓돈’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또 국민연금보다 보장수준이 높은 공무원 연금 등 특수직역연금에 정부가 매년 수조원씩 적자를 세수로 보전해 주면서 연금제도를 둘러싼 국민의 불만은 극도로 높아진 상황이다.

노인 인구가 급증하는 사회일수록 연금제도가 꼭 필요하다. 앞서 기금이 고갈돼 후세대 부담이 늘어난 나라 중에 연금제도를 포기한 곳은 없다. 국가 차원의 노후 대비는 고령화사회에서 손 놓을 수 없는 문제다. 국민연금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려면 “정부와 정치권이 그간의 실책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조치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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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급보장 명문화 목소리 커져

국민연금 가입자들에게는 “매월 강제로 연금보험료를 떼이지만 정작 자신은 수급연령 때 못 받을 수 있다”는 불신이 깊다. 지난 17일 열린 ‘4차 재정추계’ 관련 공청회에 참석한 일부 전문가들은 신뢰를 얻기 위한 첫 단추로 “국민연금법에 국가의 연금 지급보장을 명문화하라”고 주장했다. 이날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가 “지급보장 명문화를 검토한 결과 명문화하지 않는 현행 유지가 합리적이고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낸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용하 국민연금연구원장은 “현행 국민연금법 자체가 수급권을 보장하고 있다”며 “지급보장이 급여수준을 말하는 건지, (얼마가 됐든)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지, 수지 적자가 발생하면 적자를 보전하겠다는 건지 등 의미가 모호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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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장의 설명대로 현행법에 따라 기금이 고갈되더라도 수급권은 보장된다. 다만 연금운용방식이 현재처럼 기금운용수익을 더하는 ‘적립식’에서 매년 그때그때 걷어서 지급하는 ‘부과식’으로 바뀔 뿐이다.

국민이 요구하는 건 국가의 적자보전 원칙이다. 이에 대해 제도발전위원회의 한 위원은 “적자보전을 명문화하려면 가입자들도 그에 상응하는 보험료를 부담해야 한다”며 “해외 사례를 봐도 개혁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본 뒤 더 이상 국민에게 부담을 요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서야 국가가 적자를 보전했다”고 말했다. 1960년대 부과식으로 전환한 독일은 현재 연금 지출액의 24.2%를 세수로 메우고 있다. 독일의 보험료율은 2016년 기준 18.7%다. 하지만 정창률 단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제도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현 상황에서는 추상적 수준에서라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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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운용 수익률 0%대…파행 운용도 불신 초래

국민연금 도입 이래 각 정부는 국민의 노후자금을 정권 사업에 활용하며 불신을 키웠다. 1990년대까지는 연기금을 대놓고 가져다 쓰며 낮게 설정된 이자조차 제대로 갚지 않았다. 박근혜정부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으로 재벌 경영권 승계에 국민 노후자금을 동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정권마다 대통령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재원을 얘기할 때마다 연기금 활용 운운한 것도 반발을 샀다. 박근혜정부는 기초연금 부족 재원을 연기금으로 충당하겠다고 내세웠다가 역풍을 맞았다. 보육과 임대주택, 요양 등 공공인프라에 연기금을 투자하겠다는 현 정권의 국민연금 공공투자 방침도 수익률 관점에서 엄격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호시탐탐 국민의 노후자금에 눈 돌린 것도 모자라 기금운용본부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점도 신뢰를 떨어뜨렸다. 현재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1년간 공석 상태다. 이후 본부장 선임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청와대 개입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지난 1∼5월 기금 수익률이 0.46%를 기록하며 “원금마저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연금제도 개선을 위해선 기금운용 측면에서 국민이 우려하는 부분에 대한 답변과 방안을 기금발전위원회가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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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연금 연금 특혜…상대적 박탈감 키워

국민연금의 역린 중 하나가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등 특수직역연금과의 차이다. 이를 두고 국민연금 가입자는 2등 시민이라는 ‘계급론’까지 등장할 정도다.

지난 개혁에 따라 향후 확정될 국민연금의 지급률은 1.0%, 공무원연금은 1.7%로, 공무원은 가입기간과 보험료가 동일한 국민연금 가입자보다 1.7배 연금을 더 받는다. 물론 특수직역연금 가입자는 기초연금을 받지 않는다. 퇴직금도 일반 사업장 근로자보다 적다. 하지만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의 형평성을 분석한 기존 연구를 보면 이 모든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공무원연금의 보장수준이 국민연금보다 높게 나타난다.

‘공무원은 박봉’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연금 특혜가 용인되는 분위기였지만, 이후 노동환경 악화로 민간 시장의 임금이 정체되고 고용안정성마저 떨어지면서 국민연금 가입자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지고 있다.

김태일 고려대 정부학연구소장은 “국민연금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특수직역연금을 개혁하거나, 처음에는 직역별로 별도로 만들어졌지만 나중에 통합한 건강보험처럼 연금제도도 통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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