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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단독]안희정 1심 판결문 전문 입수···“담배 문 밖에 두고 갔어야” 피해자에 따진 재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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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53)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 주장은 대부분 받아들이고, 피해자 김지은씨 주장은 배척했다.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이지 않은 정치인”으로 안 전 지사를 평가하며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김씨에 대해서는 방에서 나가는 등 안 전 지사를 적극적으로 뿌리치거나, 증거를 선제적으로 수집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 이같은 내용은 19일 경향신문이 112쪽에 달하는 안 전 지사 1심 판결문 전문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확인됐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판결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씨는 전날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편지를 통해 “세 분의 판사님들은 왜 제 답변은 듣지 않으시고, 답하지 않은 가해자의 말은 귀담아 들으십니까”라고 말했다.

■“안희정은 소통하는 정치인”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 부장판사)가 지난 14일 무죄를 선고한 안 전 지사의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김씨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위력이 존재는 한다고 인정했다. “도지사이며 차기 대통령 선거에 여당 후보로의 출마가 예상되고 정치·경제·사회적 유명인사들과 인적 연결망이 구축돼있는 등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유력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은 넉넉히 인정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행비서는 상사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관계에 놓여 있고, 김씨가 정치권에서 활동을 지속할 경우 안 전 지사의 평가가 중요하다는 점도 고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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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판부는 이처럼 존재하는 위력이 일상적으로 행사되거나 남용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이지 않고 참모진과 소통하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이를테면 안 전 지사가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가요’, ‘~줘요’와 같이 나이와 직급이 낮은 김씨를 존중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고압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코피를 흘리는 운전 수행비서를 대신해 스스로 한 운전, 나이 어린 흡연자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는 모습, 직원들이 불평·불만을 비실명으로 낼 수 있는 ‘무기명 토론방’ 운영도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권위적이지 않다는 근거로 들었다.

또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김씨에게 고용·승진·급여 등을 이유로 심리적 부담을 준 적이 없고, 김씨의 업무강도가 높지 않았다는 점을 댔다. 안 전 지사가 차에 탈 때 김씨는 조수석이 아닌 자신의 옆 좌석에 앉게 하고, 모든 일정에 수행비서가 동석하도록 한 조치에 대해서는 재판부는 “오히려 업무를 원활히 하거나 김씨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조치의 일환”이라고 봤다. 안 전 지사의 ‘선의’였지, 간음할 의도가 아니었다는 취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김씨가 이직이나 국회의원 보좌관 등 다른 정치권 업무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며 근본적으로 안 전 지사에게 좋은 평판을 쌓아야 할 계기가 없다고도 했다. 안 전 지사의 대선후보 경선캠프에서는 껴안기·뽀뽀 등 성추행 피해가 나왔지만 안 전 지사와 관련이 없다고 했다.

■“김씨 방 못 나갈 정도로 위력 분위기 아냐”

김씨는 구체적인 간음 상황을 수사·재판 과정에서 일관되게 진술해왔다. 그러나 재판부는 거꾸로 강제 성관계가 아니었다는 안 전 지사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은 안 전 지사 행위보다는 김씨가 얼마나 저항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난해 7월30일 러시아 출장 상황에 대해 재판부는 “김씨가 음주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였거나 업무로 인해 심리적으로 심각히 위축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라며 “김씨가 단순히 방을 나가거나 안 전 지사의 접근을 막는 손짓을 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안 전 지사가 위력적 분위기를 만들었거나 물리력을 행사한 사정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안 전 지사가 ‘내가 외로우니 위로해달라, 나를 안아라’는 취지로 강요한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김씨가 거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이를 위력의 행사로 인식했을지도 의문”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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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전 지사의 행동에 당황해 평소와는 달리 고개를 떨구고 ‘아니요’라는 말을 중얼거렸다는 게 김씨 주장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남녀가 단둘이 호텔방에서 성적 접촉을 하기에 이르렀을 때의 태도를 평소 업무태도와 비교해 안 전 지사가 김씨의 거절의사를 인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는 어렵다”며 안 전 지사 입장에 수긍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불쾌한 첫 신체접촉을 당한 상태였는데도 김씨가 소극적으로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지난해 9월3일에는 담배를 가져다 달라는 안 전 지사 부탁을 김씨가 수행하려다 간음 상황까지 간 것이지만 재판부는 김씨의 부주의로 봤다. “김씨가 업무초기에도 안 전 지사의 객실 방문 앞에 물건을 두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며 “담배를 안 전 지사 방문 앞에 두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만 했어도 담배를 가져다주는 업무는 지시대로 수행하되, 간음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그리하지 않았다”는 게 재판부 말이다.

■“성인 여성 그루밍 어려워”

신뢰를 쌓아 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피해자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그루밍’에 대해서 재판부는 배제했다. 안 전 지사가 김씨에게 수행비서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겼고, 가벼운 신체접촉부터 점차 강도 높은 성폭력으로 이어진 점, 특별 대접을 한 점 등을 들어 김씨가 그루밍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전문심리위원 평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그루밍은 주로 아동·청소년 혹은 성적 주체성이 미숙한 대상을 상대로 해 성적으로 심리적 길들이기를 하는 현상”이라며 “전문직으로 활동하는 성인 여성의 경우에, 그것도 약 한 달 사이에 그루밍에 이를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올해 2월25일 간음에 대해서는 서지현 검사가 성폭력 피해를 세상에 알린 뒤 미투 운동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도 피해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날 밤 텔레그램 메시지를 김씨가 확보해놓지 않은 것이 재판부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김씨가 도청 직원의 성희롱성 발언에 항의한 사례는 되레 안 전 지사 무죄의 근거로 활용됐다. 재판부는 “(성희롱성 발언을 한) 직원에 대해 사과를 받고 문제제기한 것을 보면 김씨의 성적 자존감과 주체성이 결코 낮다고 보기 어렵다”며 “김씨가 대상과의 관계적 특성에 따라 성적 자기결정권을 선택해 행사하는 것으로 볼 여지마저 있다”고 했다. ‘정조’라는 표현에 대해 김씨가 증인신문 때 이의를 제기한 것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지하면서 자기 책임 아래 이를 행사할 수 있는 충분하고 성숙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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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비서에서 정무비서로 보직이 변경된 뒤 김씨의 스트레스가 컸다는 점은 고용 권한을 갖고 있는 안 전 지사가 김씨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지만 재판부는 반대로 봤다. “김씨가 안 전 지사를 차기 대통령이 되도록 보좌하는 것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욕구 충족이 될 수 있다”는 전문심리위원 의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는 사회경험이 충분하고 성숙한 전문직 여성인 김씨가 자신의 정치적 방향에 따른 합리적 선택과 타협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고 안 전 지사가 성적 길들이기를 한 여건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정치인으로서의 긍정적인 이미지에 호감을 보이는 다수의 지지자들이 있었고 이 중에는 여성 지지자의 비율도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 전 지사가 대중 앞에 서는 정치 행보에서 오는 공허함에 대한 위로를 찾는다는 심리와 더불어 일종의 나르시시즘 혹은 자기연민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신을 지지하거나 흠모하는 여성의 위로를 유도한 것으로 볼 여지가 없지 않다”면서도 위력을 행사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씨 측 대리인단은 1심 판결 선고 직후 “기존의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법리나 원칙에 의하더라도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할만한 요소는 없었지만 법원은 피해자의 진술 및 피고인의 유죄를 증명하는 숱한 증거들을 너무도 쉽게 배척했다”며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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