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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박수찬의 軍] 일제 침략도구였던 남북철도…평화철도로 거듭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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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영국에서 승객 운송용 증기기관차가 리버풀-맨체스터를 왕복하기 시작한 이래로 철도는 물류 유통 측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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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남북 정상회담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4월 28일 오전 경기 파주시 임진각을 찾은 관광객들이 철도중단점 열차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마차보다 훨씬 많은 화물을 빠르게 수송할 수 있는 철도의 특성에 주목한 각국 군대는 철도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남북전쟁에서 남북 양측은 철도 확보를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27년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제너럴’(The General)은 남북전쟁 당시 남군을 태운 증기기관차 제너럴 호가 조지아에서 북군에게 탈취 당하자 남군이 테네시에서 열차를 되찾았던 실화를 그린 영화다. 1898년 수단에서 벌어진 옴두르만 전투에서 영국군을 지휘한 키치너 장군은 누비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군용철도를 부설해 보급품 수송기간을 4개월에서 11일로 단축, 수단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19세기 말 열강들의 침탈이 잇따랐던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초의 철도였던 경인선과 경의선, 경원선 등 주요 철도들은 일본의 침략과 수탈 도구 역할을 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남과 북으로 나뉘면서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구성을 통한 동북아 다자안보기구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철도를 매개로 한 동아시아 평화질서 확립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제의 대륙침략 가능케 한 경의선과 경원선

서울-신의주를 잇는 499㎞ 길이의 경의선과 서울-원산을 연결하는 223㎞ 길이의 경원선 철도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만주 침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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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이후 분단과 통일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반영하듯 4월 29일 오후 경기도 파주 임진각이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파주=하상윤 기자


1897년 자주독립을 선포하며 황제국임을 선언한 대한제국은 철도망을 서양열강들이 장악하면 국가 존속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인식, 철도 건설을 국내 회사가 담당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반도 군용철도의 필요성을 느낀 일본은 대한제국을 압박해 경의선과 경원선 부설권을 획득했다.

1906년 완공된 경의선 건설 과정은 일본의 악랄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철도와 정거장, 화물 보관소 부지에 위치한 토지 소유자에게 “3일 안에 떠나라”고 일방 통보했다. 토지 주인의 허락 없이 나무를 베어내고 무덤을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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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시 소재 경의선 도라산역. 문화관광부 제공


수천명이 땅과 집을 빼앗겼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에 저항하다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졌다. 그나마 지급된 보상금도 당시 시가의 10% 수준에 불과했다. 지방관아에서 피해 사실을 보고받은 대한제국은 속수무책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을 맺은 일본은 민심 수습 차원에서 일부 토지를 돌려줬지만, 5년간에 걸쳐 경의선 개축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민심은 더욱 악화됐다.

경의선에 대한 백성들의 원한은 1914년 개통된 경원선으로 이어졌다. 1910년 10월 서울 용산에서 공사가 시작됐지만 경술국치에 분노한 백성들과 의병들의 습격이 잇따랐다. 일본인 측량 기술자들이 한복을 입고 헌병대의 보호를 받으며 작업을 해야 할 정도였다.

경의선은 1911년 압록강 철교를 완성하면서 서울과 만주 장춘을 연결하는 직통 특급열차가 운행됐다. 남쪽으로는 경부선 철도와 부산-시모노세키 항로를 통해 일본 본토 철도와 연결됐다. 일본-한반도-만주-중국내륙을 연결하는 교통로에서 경의선이 핵심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경원선은 1928년 함경선이 개통되면서 경원선과 연결이 이뤄져 3~7일 걸리던 서울-회령 노선은 26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이를 통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할 수 있었다.

빠르고 안전한 교통로를 확보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대륙침략에 박차를 가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국 괴뢰 정부를 세운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내륙을 침략했다. 일본 본토에서 출발한 일본군 병력과 보급물자, 한반도에서 수탈한 식량 등의 자원은 경의선을 통해 중국 전선으로 옮겨졌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1945년 8월까지는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보급로로서 일본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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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매개로 한 평화정착, 실현 가능성 ‘물음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한반도는 38선을 중심으로 분단됐다. 남북을 연결하던 경의선과 경원선도 운행이 중단됐다. 경의선은 2007년 5월 단절됐던 20㎞ 구간이 연결됐으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경원선은 연결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으나 실현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와 관련해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동북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 하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동아시아철도공동체에 대해 “우리의 경제지평을 북방대륙까지 넓히고 동북아 상생번영의 대동맥이 되어 동아시아 에너지공동체와 경제공동체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는 동북아 다자평화안보체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구상은 남북철도를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중국횡단철도(TCR)와 연결해 한반도-유라시아-동북아를 잇는 철도망을 구축하자는 것으로 운송시간과 비용 등을 단축해 동북아 경협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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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조차장에 모여있는 화물열차들. 코레일 제공


경제를 매개로 한 정치, 안보 다자협의체 구성은 1951년 프랑스와 독일 주도로 창설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대표적이다. 석탄과 철강 공동관리를 통해 정치적, 군사적 신뢰를 구축해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공동체(EC)를 거쳐 유럽연합(EU) 창설의 밑거름이 됐다. 1975년 서아프리카 15개국이 결성한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는 관세 철폐 등 자유 무역을 목표로 했지만 역내 평화유지활동 등 안보 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통한 역내 다자평화안보체제 구축이 가까운 시일 내 실현될 지 여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전망이 적지 않다. 우선 북한 철도를 현대화하고 규격이 서로 다른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북한 철도를 연결하는 기술적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북 제재 품목을 북한에 반입해야 한다.

하지만 국제올림픽연맹(IOC)의 스포츠 용품 북한 반입 요청이 미국의 반대로 대북 제재 예외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북한 비핵화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지 않는 한 철도 공사 장비나 자재의 북한 반입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설령 장비, 자재 반입이 가능해진다고 해도 북한은 외국 업체의 직접 시공 대신 자체적인 건설 공사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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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산천 고속열차가 레일 위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코레일 제공


다자 경제, 안보협력체 구성에 필요한 ‘가치 공유’ 문제도 지적된다. 유럽연합은 유럽, 기독교 문화와 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라는 공통의 가치관을 토대로 상호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는 언어와 종교, 풍습은 다르지만 아프리카인이라는 인식과 식민지배 경험을 갖고 있다.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몰도바는 구암(GUAM)을 구성, 유럽과의 통합을 목표로 경제, 안보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반면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통한 다자 평화안보체제는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찾기가 힘들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유교문화와 불교문화 및 기독교문화로 나뉘는 동아시아의 가치관을 지리적 기준에 의해 인위적으로 묶을 경우 이해관계가 엇갈려 제 역할을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주창으로 유럽연합 회원국과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이 정치적, 경제적 협력을 목표로 만든 지중해연합은 회원국 간 정치, 문화, 종교적 차이와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실현 가능성이 낮은 대규모 사업보다는 다음달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규모가 작은 사업부터 시작해 남북 간 신뢰를 구축하고 북미 대화를 촉진하는 점진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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