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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팝 디바’ 휘트니 휴스턴의 비극, 암울하지만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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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휘트니>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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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휴스턴에 대한 다큐
말년의 비극적 삶 너무 유명
새로운 얘깃거리 없을까봐
처음엔 감독 제안 거절 고민도

데뷔 전 공연, 국가 독창 장면 등
그의 빛나던 모습 충실히 묘사해
“이 영화는 일종의 추리소설”
비극 원인 제공자 폭로하기도


‘이제는 실질적으로 5월부터 9월까지 여름’이라는, 승복하기 싫은 대법원 확정판결 같은 뉴스가 우리의 심혈관계를 옥죈다만, 그래도 영화판에서는 링에 오를 헤비급 선수들은 전부 올라옴으로써 뭔가 여름의 클라이맥스가 지난 듯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이 포스트-여름 대격돌 시기야말로 매우 재미있는 시기다. 천만 고지를 향한 밀물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작고도 흥미로운 영화들이 모래사장 위로 고개를 내미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특히나 다큐멘터리들이 눈에 띄고 있는바 ①사드가 배치된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의 토박이 할머니들에게 시선을 맞춘 <소성리> ②벌건 대낮에 혐한/차별 데모를 일삼는 일본 우익에 말 대신 주먹 및 발차기로 응답함으로써 일약 주목을 받은 야쿠자 출신 상남자 ‘다카하시’ 및 그의 조직 ‘오토코구미’(男組), 그리고 반차별 운동조직 ‘카운터스’의 얘기 <카운터스> ③세계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 중 하나인 휘트니 휴스턴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는 <휘트니> 등등이 그 면면이다.

관객을 압도하는 휘트니

우선 <소성리>에서는 소성리 할머니들의 일상과 그것을 이루는 작고 소소한 것들을, 정성스레 차린 소반처럼 단출하게 담은 화면이 단연 돋보인다. 마냥 귀여워 보이는(죄송합니다) 할머니들의 낙천적인 일상 뒤편에 숨어 있는 트라우마도 놓치지 않는 시선 또한 진중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그 생생함이 정해둔 틀 안에 안착해버린 것은 끝내 아쉬웠다. 시점과 시선의 담백함이 관점에까지 녹아들었다면, 사드 이슈의 거대함과 첨예함조차도 뛰어넘는 훨씬 특별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카운터스>는 (최소한 초반 30분은) 웬만한 극영화보다도 더 픽션 같고, 웬만한 코믹액션보다 웃기고도 통쾌하다. 특히나 오전에는 문신을 과시하며 ‘참된 우익’을 표방하고 오후에는 극좌파 활동가들과 함께 극우에 맞서며 경찰 체포까지 불사하는 이 ‘다카하시’라는 인물은 거의 만화에서 현실로 곧장 튀어나온 것 같은데, 이 희한한 캐릭터도 캐릭터다만, 그 맞은편에서 차별데모를 이끄는 ‘사쿠라이’라는 인물의 애처로울 만큼 저열한 면모를 구경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다만 자신의 인물들을 더 깊고도 냉정하게 파고드는 대신 ‘카운터스’ 활동 전체로 시선을 돌리며 거의 교육용 영상 근방까지 흐르는 중반부의 양상은, 초반의 속도 및 파워와 대비되며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영화가 다카하시라는 흥미로운 인물로부터 끌어낸 결론은 우리의 양분법적 사고방식을 유쾌하게 건드리며 뇌세포 마사지 같은 개운함을 남긴다.

그리고 <휘트니>.

소재가 곧 제목인 위의 두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휘트니> 역시 제목 그대로 휘트니 휴스턴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1990년대생 이하 연령대의 관객이 얼마나 그 위용을 체감하실지는 모르겠다만, 휘트니 휴스턴은 그야말로 싫어할 수는 있어도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아니, 싫어하기도 여간해선 어려운 존재였다. 엄마 시시 휴스턴부터가 유명 가수인데다 사촌 중에 디온 워릭(‘Walk On By'도 있겠지만 그녀의 곡 중엔 ‘That's What Friends Are For'가 국내에선 더 유명할 것이다)이 있을 정도로 타고난 자질과 배경부터, 어렸을 때부터 가수를 목표로 엄마로부터 받은 철저한 트레이닝, 그럼에도 가수가 아닌 모델로 일을 시작할 정도의 미모, 그리고 천진함과 우아함 등등까지, 데뷔 이전부터 그녀를 특별하게 했던 요소를 굳이 이 자리에서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견주려면 마이클 잭슨 정도뿐일까 싶을 정도의 고도에 도달한 그녀의 커리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모르셔도 무방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녀의 몇몇 모습들, 그 길지 않은 자료화면 속 모습만으로도 그녀에게 압도당하기엔 모자람이 없으므로.

그런 그녀가 또 다른 흑인스타 바비 브라운과 결혼을 하면서 순탄치 않은 사생활을 맞고, 마약에 빠져서 거물 스타들에게는 흔한 자기파괴적인 패턴을 밟아가며 세상으로부터 잊히더니, 충격적으로 망가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하고, 또 그 얼마 뒤 갑작스럽고도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말았다, 라는 것이 세상이 알고 있는 개략한 줄거리일 것이다.

요컨대 이 영화는 우리가 선호하는 그런 풍의 성공 스토리일 수는 없다. 그러기에 휘트니 휴스턴의 말년의 비극은 너무 유명하다. 그렇다고 그 비극에서 어떤 사회적 함의 같은 것을 찾아내기도 어려워 보인다. 휘트니 휴스턴은 이 영화의 감독인 케빈 맥도널드가 2012년 <말리>에서 다뤘던 밥 말리처럼 한 시대의 정신을 대변했던 아이콘도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은 그저 개인적 차원의 자체 붕괴로 보일 뿐이다. 그러니 케빈 맥도널드가 감독직 제안을 받고는 “휘트니 휴스턴에 대해서 뭔가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거절하려고 했던 것도 나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는 “누구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아티스트에 대한 심각한 다큐”(감독의 말)가 되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점이 ‘심각’하다는 말인가.

이 ‘심각’이라는 말의 중심에는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폭로가 있다. 영화는 휘트니 휴스턴이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가장 결정적인 원인과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폭로한다. 바로 이 대목이 영화의 첫 공개 시점부터 상당히 논란이 된 지점인데(그 폭로가 굳이 필요했는가? 그 폭로는 정당한가? 등등) 이는 애초 케빈 맥도널드가 감독 제안을 수락했던 이유가 “휘트니 주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비쳐 보였던 은밀한 죄책감”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이끌렸기 때문이고, 심지어 “내게 이 영화는 일종의 추리소설”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이 폭로 없이는 이 영화는 어쩌면 성립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감독은 결국 영화 제작 과정의 막판에 이르러 극적으로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해답을 얻어냈고, 이를 그대로 영화를 통해 공개함으로써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에서 이 폭로가 가지는 비중은 결코 크지 않다. 영화는 휘트니 휴스턴을 곁에서 오래 지켜봐온 세 사람(올케이자 매니저인 팻 휴스턴, <보디가드>에 휘트니를 캐스팅한 영화 에이전트 니콜 데이비드, 휘트니를 인터뷰했던 리사 어스파머)에 의해서 기획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바람대로 영화는 비밀의 방을 열어젖히는 것 이전에, 단순히 ‘마약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쳐버린 왕년의 스타’로만 기억될 뻔했던 휘트니 휴스턴의 데뷔 이전의 공연 모습, 첫 정식 티브이(TV) 출연 화면, 그리고 몇 번을 보아도 여전히 소름끼치는 슈퍼볼에서의 미국 국가 독창 장면까지, 보안경이 필요할 정도로 빛나던 그녀와 그 광채가 사람들에게 남긴 것의 흔적을 충실하게 따라감으로써, 우리에게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가치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처음부터 안고 들어간 비극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암울하지만은 않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휘트니>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다큐가 던지는 메시지

사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케빈 맥도널드의 작품 중 같은 ‘음악다큐’로 분류될 수 있는 <말리>보다는, 극한의 산악사고 생존담인 <터칭 더 보이드>를 훨씬 자주 떠올렸다. 왜냐하면 <휘트니> 역시 <터칭 더 보이드>처럼 결국, 누군가가 가장 높은 곳에 오를 때까지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운명의 발톱이 마침내 그(녀)를 덮치는 그 무시무시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터칭 더 보이드>의 주인공은 실로 초인적인 의지로 살아남았고, 휘트니 휴스턴은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전쟁”(영화 속 인터뷰이의 말)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어디 휘트니 휴스턴뿐이겠는가. 인생은 수많은 함정으로 가득하고, 운명의 발톱은 종종 우리에게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안긴다. 물론 그것은 쓰러진 휴스턴의 살점을 사정없이 쪼아댔던 대중매체들과 세상의 야유처럼 비난거리도, 조롱거리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공감과 위로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일 뿐이다.

하여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그녀를 자신이 머무는 호텔로 불러 몇시간이고 서로 말없이 같이 있어주곤 했다는 마이클 잭슨처럼, 세상의 수없이 많은 상처받은 삶들 옆에 조용히 말없이 함께 앉아 있어주는 법을 알아가게 된다. 각종 시각적 특수효과(VFX)로 중무장한 픽션보다 훨씬 흥미로운 이런 다큐들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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