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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여성들은 왜 서울서부지법에 분노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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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안녕하세요, 저는 ‘친절한 기자들’로 처음 인사드리는 사회부 24시팀의 임재우 기자입니다. 저는 ‘마포 라인’이라 불리는 서울 마포구 일대의 일선 경찰서와 서울서부지방법원 등에 출입 중인데요. 이번 주 ‘마포 라인’에 출입하는 기자들이라면 누구나 ‘헐떡고개’를 넘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서울서부지법에서 월요일에는 ‘홍대 모델 불법촬영 유포 사건’ 1심 선고가, 바로 다음날인 화요일에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 1심 선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건에 대한 법원의 첫 판단은 여성계를 중심으로 큰 반발을 불렀습니다. ‘솜방망이 처벌’이 흔하다고 인식되어온 불법촬영에 대해서는 징역 10개월이 선고되었고,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를 받아온 안 전 지사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여성계를 중심으로 ‘사법부의 편파 판결’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걸까요. 일각의 주장처럼 법원은 ‘법에 따라’ 판결한 것뿐인데 주목도가 높은 사건이라 여성들이 ‘유별나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홍대 불법촬영 사건’의 죄목인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죄’를 중심으로 ‘분노의 근거’를 따져봤습니다.

‘불법촬영 범죄’는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성범죄 중 가장 극적으로 늘어난 성범죄입니다. 대검찰청의 범죄분석통계에 따르면,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는 2007년에는 전체 성폭력 범죄의 3.9%(564건)에 불과했지만, 2015년에는 전체의 24.9%(7730건)를 차지하게 됩니다. 8년 만에 우리나라 성범죄의 4분의 1을 차지하게 된 겁니다.

누가 ‘불법촬영’ 범죄를 저지를까요. 한국여성변호사회가 지난 3월 작성한 ‘디지털 성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지원 방안 연구’를 보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평소 아는 사이인 경우는 11%, 모르는 사이인 경우는 89%였습니다. ‘아는 사이’인 경우 ‘연인 관계’의 비율이 절반 가량을 차지했지만, 기타 피해 사례를 보면 그야말로 ‘온갖 관계’가 발견됩니다. 학원장이 자신의 수강생인 여고생을, 의사가 자신의 환자를, 사진사가 사진관 고객을 상대로 불법 촬영을 했고, 심지어 호스트바 종업원이 자신의 손님을 불법촬영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피해 장소를 보면, 지하철이 55%로 과반을 차지했고, 길거리가 10%, 버스와 택시 안이 5%, 집이나 숙소가 3%를 차지했습니다. 이외에도 공연장, 은행창구, 학원 강의실, KTX 안, 마트, 서점, 백화점, 목욕탕, 수영장에서도 불법촬영이 이뤄졌습니다. 일상생활 속 거의 모든 공간이 ‘불법촬영’의 피해장소가 될 수 있는 셈입니다.

이번 ‘편파 판결’ 논란의 핵심인 법원의 처벌 수위는 어땠을까요. 2011년 1월부터 2016년 4월까지 서울 각급 법원에서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 혐의로 1심 선고된 1540건을 보면, 벌금형은 72%, 집행유예는 14.7%, 선고유예가 7.4%이었고 징역형은 5.3%에 불과했습니다. 홍대 사건처럼 촬영물이 유포된 경우만 보더라도, 분석대상 판결 66건 중 징역형이 선고된 사건이 18건(27%)에 불과했습니다.

구체적인 판례를 들여다볼까요. 2015년 서울서부지법은 여자친구와 이별하자 10차례에 걸쳐 촬영한 여자친구의 나체 사진을 지인 6명에게 휴대폰으로 전송한 피고인에게 벌금 300만원형을 선고했습니다. 같은 해 6월 서울중앙지법은 지하철 출구 에스컬레이터에서 피해자의 치마 속을 촬영한 피고인에게 동종 전과가 있음에도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했다는 이유로 벌금 200만원형을 선고합니다. 법원의 판결은 사건마다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사안마다 다르다는 의미)라지만, 그간 법원이 디지털 성범죄를 ‘솜방망이’ 처벌해왔다는 주장을 무시하긴 힘들어보입니다. 분석 대상이 된 사례 중 99%(1523건)가 여성이 피해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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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경찰과 법원도 할 말이 있을 겁니다. 피의자 특정이 용이해 수사가 빨랐고, 피의자가 증거인멸을 시도했기 때문에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워마드’라는 전파성이 강한 커뮤니티로 유포했기에 실형이 불가피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껏 일상생활 속에서 만연하게 벌어져왔고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불법촬영’을 그간 우리 사회가 ‘가볍게’ 여겨왔다는 것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홍대 모델 불법촬영 사건 1심 선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속한 수사와 엄격한 판결은 그 자체로는 칭찬받을 일이죠. 하지만 여성들이 피해자인 사건도 그렇게 처리해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성들의 요구는 분명합니다. 다른 디지털 성범죄도 ‘홍대 불법촬영 유출 사건처럼’ 처리해달라는 것입니다.”

임재우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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