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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구혜영 기자가 만난 政치&情치]이정미 정의당 대표 “5석 미니정당이 지지율은 15%…실력 다져 이 간극 넘어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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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정의당 대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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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정의당이라 죽음 택해…

당이 타격 극복 어렵다 봤을 것

빈소 찾아 울다 간 노동자들,

그들에게 노회찬은 위안이었다

당 지지율 상승세, 정치가 좋아져야 한다는 요구 작동한 결과

민주당과 개혁 경쟁구도로 가기보다 한국당과 겨루고 싶어


정의당 이정미 대표(52)는 휴대전화기에 노회찬 전 원내대표의 유서를 품고 다닌다. ‘노회찬’이라는 이름은 진보정당 원천기술 보유자, 진보를 시민과 정치 곁에 가까이 두었던 대중정치인, 말 그대로 큰 산이었다. 이 대표에겐 전선·노동운동에 집중했던 이정미를 정치인 이정미로 발돋움하게 해준 선배였다. 노선은 달랐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술잔 속에 깊은 이념의 골도 메웠던 관계다.

지난 7월23일 청천벽력 같은 그의 죽음 이후 문득문득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왜 당신이냐, 왜 하필 당신이어야 했냐고 몸서리치게 원망도 했다. 그러나 유서 마지막 ‘당은 당당하게 나아가라’는 글을 보며 송곳 같은 아픔을 거두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유서에 한 줄짜리 답장이라도 보내고 싶다. ‘노회찬 있는 정의당’과 ‘노회찬 없는 정의당’이 절대 다르지 않도록 하겠다고.

지난 14일 천안 국립망향의동산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 행사를 마치고 온 이 대표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타들어가는 한여름 햇빛이 이 대표에겐 차라리 다행이겠다 싶었다. 간간이 붉어진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땀이라 우길 수 있었을 테니.

■ 노회찬과 이정미

이 대표는 2003년 민주노동당 시절 당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땐 ‘노선이 달랐던’ 노 전 원내대표가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2008년 2월 일심회 사건에 연루된 두 당원의 제명안을 결정키로 했던 당 대회에서 이 대표는 부의장을 맡았다. 결국 제명안은 부결됐다. 노 전 원내대표는 탈당 후 진보신당행을 택했고, 이 대표는 민노당에 남았다. 몇 차례 부침을 겪은 뒤 2012년 정의당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당 최고위원 도전, 총선 비례대표 출마, 당 대표 취임까지 노 전 원내대표는 이 대표의 ‘정치적 사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대표는 얼마 전 심상정 의원에게 “이제 내겐 큰언니만 남았네요”라고 ‘큰오빠’(노 전 원내대표)를 보낸 아픔을 털어놨다.

- 어떻게 지내고 있나. 요즘 이 대표 말과 글을 보면 굉장히 건조하다(이 대표는 웃음도 많고 정도 많은 성격이다).

“그런가. 노 전 원내대표 보내고 나서 일만 했다. 다 놓아버리고 슬픔에만 확 빠져 있는 시간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안되겠다 싶었다. 새로 가입한 당원들에게 감사 전화를 하면 내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 난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 시민들이 함께 슬퍼해주셔서 최선을 다해 답을 드려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 누구도 그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돈의 액수를 떠나 ‘노회찬도 돈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정의당이기 때문에, 정의당 소속 정치인이라서 죽음을 택했다. 당이 입을 타격을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을 거다.”

- 5일장 내내 상주를 맡았다. 추모 대열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눈물을 참느라 잠시 인터뷰가 중단됐다) 노동자들이 많았다. 땀에 전 티셔츠를 입고 뒤꿈치가 다 해진 양말을 신고 절한 뒤 한참을 울다 갔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삶이 너무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아, 노회찬은 이들에게 위안이었구나’ 싶었다. 위로해줄 누군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전해졌다.”

- ‘노회찬’은 이 대표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

“너무도 큰 사람이었단 걸 그가 가고 나서 느꼈다. 2003년 민노당에 와서 처음 만났다. 그땐 그리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당선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총선에 기꺼이 출마하겠다고 하자 ‘이정미는 정파적으로 정치를 대하지 않는구나’라고 격려해주며 나를 눈여겨봤다. 본회의 끝나는 날이면 새벽 6시까지 함께 술을 먹었다. 한잔하자고 요청하면 이 동네 무슨 술집의 어떤 안주가 맛있다며 살뜰히 챙겨줬었는데….”

- 노회찬의 정치적 유산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복잡한 거 아니다. ‘당은 당당하게 나아가라’는 유서 내용이 모든 걸 말해준다. 나는 이 한 줄로 이 당을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 정의당은 이제 이념(진보)이 아닌 ‘인물’(노회찬)을 정치 원형으로 갖게 됐다. 더불어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구심으로 한 뒤 성장했던 것처럼.

“제대로 뜻을 잇지 못하면 인물은 신화로 남는다. 진보정당은 오랫동안 이념적으로 대립했다. 그는 정의당 스스로가 정치세력으로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정당은 명연설 ‘6411번 버스’ 속에 나온, 모든 ‘투명인간’들의 손을 잡아주는 정당이다. 그가 올해 초 한 언론 인터뷰에서 ‘10년 안에 정의당에서 대통령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당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진보정당이 집권해야 한다는 그 유지를 반드시 따르겠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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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지지율이 파죽지세다. 노 전 원내대표 별세 후 두 자릿수를 넘더니 최근 15%대도 돌파했다. 정의당은 창당 후 5년을 ‘정당 만들기’ 시기로 규정했다. 시기적으로나 지지율 추세로나 현재 정의당은 이 대표가 취임사에서 밝힌 ‘유력정당’ 건설기에 들어섰다. 이 대표는 이 시기에 당을 이끌고 있다. ‘노(회찬)·심(상정) 체제’가 1차 기반이었다면 지금은 2차 기반을 구축할 때다. 생존을 위한 진보 정당이 아닌 비전과 가치를 제시하는 강한 정당으로 가는 갈림길에 있다는 뜻이다.

- 노 전 원내대표 유지를 잇겠다는 건 대중적 진보정당을 지향하겠다는 뜻일 텐데. 선명성도 붙잡아야 하지만 우편향(표)도 필요할 것 같다.

“선명한 진보란 것도 너무 복잡하다. 정치는 박제화된 이념이 아니라 현재 지형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현재로선 문재인 정부하에서 선명한 개혁성을 놓치지 않고 존재감을 만들어가야 한다.”

- 대중적 진보정당을 선언했지만 그동안 민주 대 반민주 구도(민주당 2중대 논란, 반자유한국당 투쟁)의 틀에 안주하진 않았나.

“양당 구도 패러다임이 너무 오래 고착화되니 우리가 민주당 잘한다고 하면 2중대, 비판하면 발목잡는다고 한다. 과거의 창으로 정의당을 보면 그런 평가밖에 못한다. 사표론, 단일화 압박 이젠 사라지지 않았나.”

- 정치권에 불붙고 있는 진보경쟁도 부담으로 작용할 것 같다.

“동의할 수 없다. 지금 누가 진보를 말하고 있나. 노동권조차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가 진보를 선언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대표 개인 스탠스이지 당이 뒷받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의 방향이 정립되지 않아 갈팡질팡하지 않나. 정당 만들기에 제대로 주력해야 한다. 대선후보군 중심으로 정치를 해석해온 게 오랜 관행이다. 선거제도 개혁만 해도 좋은 정당의 경쟁 구도가 돼야 가능하다. 그게 안되니 여든 야든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중요성을 못 느낀다. 더불어민주당만 해도 전당대회에서 김진표 후보의 보수성이 부각됐을 뿐 당 차원의 대안적 진보성은 부각되지 않는다. 집권여당 전대에서 은산분리 논쟁을 누구도 하지 않는 건 문제 아닌가.”

- 창당 6년째다. 생존을 걱정해야 할 단계는 지났지만 유력정당으로 자리매김하진 못했다. 이 시기의 당 대표 임무를 규정한다면.

“지난 5년은 당내 회의주의와 투쟁한 시기다. 패배주의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고비를 넘어섰다. 유능한 정당이 되는 게 중요하다. 5석 미니정당이 15% 지지를 받고 있다. 이 간극을 잘 봐야 한다. 15% 지지율에 거품이 있다는 시선이 많다. 지역구 의원도 없으니 한 방에 갈 수 있다고들 한다. 이 간극을 메우는 실력, 비전을 보여주는 실력, 사람 키우는 실력을 동시에 다져야 한다. 2020년 총선까지 두 자릿수 안정적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다음 총선에서 유의미한 의석을 확보해 힘을 가져야만 진보정당의 독자적인 수권능력을 구축할 수 있다.”

- 최근 당 지지율 상승세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나.

“정의당이 정치 변화의 변수가 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신규입당자 분포만 봐도 과거엔 민주당 왼쪽 편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이찬진씨 등 중도보수층도 있다. 정치가 좋아져야 한다는 요구이자 그렇게 되려면 정의당이 커야 한다는 욕구가 강하게 작동한 결과다. 아직은 두고봐야 하지만 새로운 지지층이 쉽게 빠지진 않을 것 같다.”

- 신규당원 7000명 중 4050세대가 많다고 한다. 젊은층은 상대적으로 가입률이 낮은 편이다

“4050은 정치의식이 높고 가능성까지 보고 투자하는 세대다. 정치의 여러 측면을 경험해보고 지지를 보내는 세대다. 반면 젊은층은 가능성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까진 없다. 삶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정치세력을 찾는다. 향후 당 과제이기도 하다.”

- 외부인사를 영입할 계획도 있나.

“5% 정당은 선거에 250명 출마해도 되지만 15% 정당은 2500명 정도는 출마해야 한다. 외부 인사 영입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 다만 당에서 성장한 나로선 마음속에 짠한 사람들이 많다. 당이 클수록 우선은 당 안에서 실력을 키워온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 진보정치 2세대 이정미

이 대표는 ‘포스트 노(회찬)·심(상정) 시대’를 준비하겠다고 강조했다. 유력정당 건설을 위한 주요 과제로 삼고 있다.

진보정당의 독자적 비전과 위상을 체화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 노 전 원내대표도 별세 전 “아니 내가 크지 말라고 한 적 있냐”고 농담하듯 말했다고 한다. 후배·신진 정치인 양성에 공들였던 까닭이다. 다음달 초 고인의 49제 때 ‘노회찬재단’ 건립 구상이 발표될 예정이다.

- 시민들은 여전히 정의당 상징으로 ‘노·심’을 떠올린다. 차기 리더군도 뚜렷하지 않다.

“대표 되고 나서도 노·심밖에 안 보인다고 할 때 섭섭했다. 당 대표인 내가 왜 주목받지 못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노 전 원내대표 별세 후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들 눈엔 다 미생으로 보일 것 같다. 내가 대표지만 지역구를 뚫지 못한 정치인이다. 노·심이 환호받을 수 있었던 건 소수정당 소속이어도 지역구 주민들에게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부분이 ‘포스트 노·심’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 정의당은 심 의원을 제외하면 모두 비례대표 초선 의원이다. 차세대 리더군은 보통 재선 의원 그룹이다. 이 대표의 재선 전략은 무엇인가.

“인천 연수구에서 준비하고 있다. 처음에 둥지를 틀 때만 해도 ‘부자’ 지역구라 당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놀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난 민주당과 정의당이 개혁 경쟁구도로 붙는 것보다 자유한국당과 제대로 겨루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 현재 지역구 의원(한국당 민경욱 의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것 보면서 제대로 경쟁해보고 싶었다. 지역주민들이 이정미 때문에 정의당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고들 한다.”

- 차세대 진보정치 리더라면 1세대 진보의 문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주도적인 정치·사회개혁 의제가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 문제에서 주춤하고 있다. 거대한 촛불민심이 만든 정권임에도 60년 적폐를 바꾸는 게 이다지도 힘든 일일까 싶다. 규제를 푸는 속도와 범위를 보면 중장기적 패러다임 만드는 끈기와 뚝심, 철학이 이전 정부와 다르지 않다는 평가가 나올까 걱정이다. 당 대표 취임 1주년 때 당내 공정경제민생본부를 만들었다. 비정규직 정당은 물론 중소상공인 정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 처음부터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당직을 맡았던 건 아니라고 들었다.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배경은.

“19대 총선 전인 2011년 친언니 말을 듣고 정치를 결심하게 됐다. 언니가 발달장애 아들을 키운다. 너무 힘들어서 보장성 보험을 들겠다고 내게 상의했다. 발달장애아 부모들은 일찍 죽는다는 말이 있으니 보험금으로 아들을 보호해달라고 하더라. 언니 손을 잡고 ‘절대 보험 들지 말라’고 했다. 내가 장애아들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 페미니즘 정치를 강조했다. 당내 페미니즘 정치를 어떻게 구현할 생각인가.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 지분이 크다면 분야별 페미니즘 실현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페미니즘 자체 지분이 적어서 경계가 정립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정치권, 시민사회 등 각 영역의 역할을 구분하는 게 애매하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판결을 보니 실망을 넘어 절망스럽다. 사법폭력이다. 그래도 또 싸울 수밖에 없다.”(이 대표는 16일 폭행과 협박에 의한 성관계만 강간죄로 처벌하는 형법을 개정하고,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를 처벌할 수 있는 ‘비동의 강간죄 처벌’ 등 법안 발의를 약속했다)

이 대표는 16일 국회 의원회관 510호실을 들렀다. ‘노회찬 의원’ 명패가 사라지는, 국회에서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가장 각박한 곳에서 가장 잔인한 적과 싸우느라 3선 내내 제대로 임기를 채우지 못했던 선배 노회찬. 그러면서도 진보라서가 아니라 왜 진보를 지지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던 선배 노회찬. 그가 밀어올린 세상이 여기까지 왔다. ‘노회찬 없는 정의당’이 꽃필 차례다. 아직은 떠나지 말고 조금만 더 서성여달라.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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