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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Why] 뻔한 건 싫다, 내 멋대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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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사 기자의 체크메이트] '축산업계 대부' 우용식씨의 별난 패션, 별난 인생

손주 50명 둔 98세 노모… 명절이면 세뱃돈으로 1000만원 챙겨드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만든다길래

내 머리에 고속도로 먼저 냈죠 한쪽만 2차선으로…

양쪽 색이 다른 구두 신고 한쪽은 짧고 한쪽은 긴 정장 바지 입고 다녀

Why? 남들하고 좀 다르게 생각하려고… 똑같은 차림에선 뻔한 생각만 나오니까

조선일보

아프리카에서도 통한 奇人 우용식씨는 기인(奇人)이란 소리를 듣고 살았다. 그는 “남들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증거 같은 것”이라며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얘기”라고 했다. 사진은 2013년 우씨가 아프리카를 여행할 때 케냐 사람들과 찍은 것으로, 이들이 먼저 다가와 촬영을 요청했다고 한다. 70대 노인이라기에는 헤어 스타일부터 눈길을 잡아끈다. /우용식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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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 패션'을 하고 나왔다고 했다. 빨강, 파랑, 연두가 섞인 반소매 실크 셔츠와 자수가 새겨진 청바지, 고무 소재로 된 빨간 신발이 썩 어울렸다. 우용식(77)씨가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벗자 왼쪽은 깨끗이 밀고 오른쪽만 기른 비대칭 머리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하고 좀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왔지요. 똑같은 차림에선 뻔한 생각만 나는 것 같더라고."

그는 30년 이상 '축산 업계의 대부'라 불렸다. 20대에 연고 없는 수원에서 축산 일을 시작해 일본을 오가며 품종 개량 등 선진 기술을 국내에 이식했다. 수원축산농협 조합장에 오른 뒤 내리 4선을 했고, 전국축협조합장협의회 회장과 축협중앙회 회장 권한대행도 지냈다. 그 조직에서 할 수 있는 직위는 다 한 것. 외모 탓에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의 재임 기간, 뒤에서 등수를 헤아리던 수원 축산농협은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으뜸 조직이 됐다.

―기인이란 말, 신경 쓰이진 않던가요.

"머리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더라고. 고향인 함양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듣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든다고 해요. 이발소 가서 '내 머리도 고속도로를 내주십시오' 했지요. 한쪽은 2차선으로 밀고 다른 쪽은 남겨달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잘 못 알아듣더라고. (머리가 흐트러질까 더 긴 오른쪽 머리를 쓱 손으로 넘기고)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아요. 저는 가진 것도 없었고 이 지역 사람도 아닙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만 해서는 일어설 수 없는 위치여서 조금 다른 식으로 산 것뿐입니다."

―당시도 다른 사고방식이 필요했나요.

"오히려 제가 산 때야말로 뭐든 바뀌어야 하던 시대였지요. 그대로는 살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1960~70년대 축산 공부를 하면서 일본을 드나들 때마다 든 생각이 '이렇게 하면 망한다'였어요. 우리 농촌을 보면 집집마다 돼지나 소 한두 마리 키우는 식이었습니다. 다 재래식 종이었지요. 일본에는 이미 품종 개량이 이뤄졌던 때였어요. 커다란 돼지들이 가득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밥상에 올라오는 육류는 다 개량종이죠.

"지금 키우는 돼지는 대부분 랜드레이스종과 요크셔종이에요. 이들을 다른 종과 교배해서 먹는 게 대부분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개량종을 분양받아 신품종을 만들었어요. 우리 재래종은 1년을 키워도 90㎏이 안 되는데, 품종을 개량하니 5개월이면 커버려요. 일본의 신명 축산이 많이 도와줬어요. 그 사장이 말수도 많지 않은데, 내 차림을 볼 때마다 그렇게 웃어요. 저한테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실 도울 이유도 없는데 특이한 사람이 배우겠다고 달려드니 좋게 생각해준 것 같아요."

뭐든 배우고 해보자

어릴 적부터 축산에 관심이 있던 우씨지만, 배우는 것 자체가 좋았다. 뭐든 배우고 해보자는 게 어린 우씨가 매일 되뇌던 생각이었다고 한다. "함양 중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 27인조 밴드부가 생겼어요. 일본에서 음악을 전공한 음악 교사가 제안해서 시골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게 생겨난 거예요."

―눈이 번쩍 뜨이던가요.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작정 찾아갔죠. 색소폰을 배워서 불었습니다. 배우는 게 재밌어서 한 거지요. 그 친구들 따라 합기도도 배우고 가르쳐준다는 건 따라다니면서 다 배웠습니다."

그것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는 몰랐다. 부산 동아대에 진학한 그는 군에 입대했고, 부산에 있는 헌병대로 발령 났다. "당시 최동락 헌병 사령관이 키가 177㎝인 나를 보더니 '할 줄 아는 게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색소폰하고 합기도를 할 줄 안다'고 했더니 '재밌는 놈이네'라면서 오늘부터 자기 방에서 근무하라는 거예요."

―사령관을 모시게 된 거군요.

"일종의 연락병 역할을 맡은 거지요. 보디가드라고 해야 하나. 권총을 차고 사복을 입고 사령관을 5m 거리에서 보좌하는 일이었어요.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직 군수기지 사령관이던 시절이니까 대단히 높은 분을 모신 것이었지요. 3년 동안 모셨는데, 물론 힘도 많이 들었습니다."

―군에서도 가축을 키웠다던데.

“관사에서 닭을 키우고 돌보긴 했지요. 그건 소일 수준이고, 제대가 가까워지면서 불안한 마음이 컸던 게 사실입니다. 축산 일을 본격적으로 해야 했는데 아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후 제가 모시던 최 사령관이 농촌진흥청 차장으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하늘이 도왔네요.

“군인이 다 높은 자리를 하던 시절입니다. 무작정 농촌진흥청이 있는 수원으로 올라갔지요. 그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최 사령관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거기 있으면서 축산에 대한 기본기를 배웠습니다.”

―곧바로 축산 일을 시작했나요.

“‘수원민간종축장’이란 간판을 달고 앞에서 말했던 요크셔, 랜드레이스 등 개량된 품종을 일본으로부터 받아 키워 팔았어요. 재래종이 주종이던 시절이었죠. 크기, 고기 맛 등이 다르니까 인정을 받기 시작했지요.”

이 기간, 그는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수원에 온 게 1960년대였는데, 그때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원에 영어 학원이 딱 하나 있었어요. 일본어는 능숙했기 때문에 영어를 하면 세상이 좀 보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어 사전을 베고 잘 정도로 단어를 외웠습니다. 말하기, 듣기 연습도 했지요. 그 덕에 지금까지 38개국을 다녔습니다.”

잘한 일? 남의 돈 멀리한 것

그는 20대에 대한양돈협회 경기도지부장이 됐고 1977년 수원 축협 이사직에 올랐다. 1998년 조합장이 된 후엔 2015년까지 18년간 내리 네 번 조합장에 당선됐다.

―젊을 때부터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최동락 사령관처럼 주변의 도움도 있었고 운도 따랐습니다. 특이한 차림 덕인지 눈에 띄는 것이 많기도 했고.”

―뭐가 보이던가요.

“1980년 도쿄에 갔는데 정육점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전부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 먹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더니 얘네는 다 마트에서 사먹는데요. 마트에서 가공, 판매를 하면 생산자에게 이익이 더 돌아가고, 품질 상승을 불러온다는 걸 알았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정육점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봤습니다.

우씨는 귀국하자마자 수원 팔달문 인근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축산물유통센터를 세웠다. 보유한 땅까지 원가에 팔았다. 독일 축산업 사례를 따라 햄과 소시지를 직접 가공해 유통했다.

조선일보

사이드 카 달린 오토바이 타고 그는 1970년대부터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당시 연립식 아파트 2가구 값을 주고 옆에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사이드 카’가 달린 오토바이를 샀다. 그는 “오토바이 뒤에 사람을 태우는 건 매너가 아니다”고 말하는 멋쟁이였다. /우용식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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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나 질투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조합원들이 점점 줄어요. 도시화되면서 축산을 안 하던 시기였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로 각박해졌지요. 그때 경기도 안산에 사료 공장을 새로 만들었어요. 무리한 확장이라고, 젊은 놈이 들어와 조합 망하게 한다고 반대도 많았습니다. 부지만 1만평 되는 큰 공사를 벌인 셈입니다. 지역 조합이라는 게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결과적으로 100명 이상 직원을 채용하고, 조합원들에 싸게 사료를 공급하는 효과를 누리게 됐습니다. 성과를 낼수록 조금씩 시선이 바뀌었지요.”

―조직 관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지역 조합장은 유지로 통하고 오가는 돈이 많아 시끄러울 수 있는 자리예요. 나는 판공비를 다 써본 적도 없고 집에 갖다준 적도 없습니다. 남의 돈에는 손댄 적 없고요. 돈에 욕심부리면 제명에 못 산다는 게 소신입니다. 그래야 싫은 소리도 할 수 있지요.”

그가 전국 축협조합장협의회 회장이던 1998년 신구범 당시 축협중앙회 회장이 농협과 축협 통합에 반대해 국회에서 할복을 시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회의 법안심의와 처리에 반대하며 관련단체 인사가 국회에서 할복 기도를 한 것이다.

―신 회장의 의도를 사전에 알았나요.

“나도 강력히 반대하고 시위도 했지만, 극단적인 일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일로 3~4개월 축협 중앙회 회장 권한대행 역할을 했어요. 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올라갈수록 내 행색에 딴죽을 거는 사람도 많더군요.”

그는 당시에도 양쪽 색이 다른 구두를 신고 다니는가 하면, 한쪽은 짧고 한쪽은 긴 정장 바지를 입고 다녔다.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오토바이 마니아로도 유명했다. 1970년대 수원오토바이협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오토바이를 사랑했다. “처음엔 남들과 다른 생각, 강한 이미지 때문이었지만 이런 차림으로도 문제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오기가 생겼습니다. 책잡히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산 면도 있고요.”

이력이 쌓이며 그는 제1차 ‘한미 우정의 사절단’에도 포함됐다. 의사, 변호사, 사업가, 공무원, 학생, 연예인 등 각계 272명이 선정돼 미국과 교환 방문을 한 민간 사절단이다.

“70년대 후반인데 사절단 단장이자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태완선씨를 찾아 반도호텔로 갔어요. 엘리베이터를 거기서 처음 타봤습니다. 얼마나 깨끗하던지 신발을 벗고 탔지요. 엘리베이터 안에 양탄자가 두껍게 깔려 있어서 잘 벗었구나 생각했어요(웃음).”

―장관이 뭐라고 하던가요.

“대번에 ‘야 이 촌놈아, 신발은 1층 신발장에 둬야지’라며 장난을 해요. 내가 복장도 특이하고 그러니까 친밀하게 농을 친 것이지요. 좋게 봐준 것 같습니다.”

―사절단엔 어떤 사람들이 있었나요.

“남진, 윤복희, 장미희 같은 연예인이 있었고, 제가 이들을 관리하는 분과 위원장이었습니다. 색소폰을 좀 불 줄 안다고 그 자리로 갔어요.”

―거기서도 멋쟁이로 통했겠네요.

“연예인 못지않았지요(웃음). 그런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 주는 한국에 대한 인상이기도 하니까요. 그저 못사는 나라로 보는 건 좋지 않으니까.”

세뱃돈 1000만원

결론은 부모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끝은 98세 노모 이야기. 무슨 일을 하건 어떤 삶을 살건 다 부모 덕이란 것이다. 이날 인터뷰 중에도 그는 노모에게 두 번 전화했다. “부모님이 젊을 적 일본에서 생활하셨어요. 저도 일본 미야기현 출신입니다. 조선 사람 대우가 뻔하지요.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티를 안 내요. 한 번도 힘들다 어쩌다 불만을 얘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덕에 나도 어디 가서 힘들단 소리는 안 하게 되더라고.”

―한국에는 언제 왔나요.

“6·25 발발 2년 전인 1948년 아버님 고향인 경남 함양으로 건너왔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30년 넘게 통치했잖아요. 당시 모든 서류가 다 일본말이었습니다. 번역을 다 해야 했어요. 근데 말과 글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가 않았어요. 아버님이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니까,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됐지요.”

―부친이 공무원이셨나요.

“함양우체국에서 근무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글 못 읽는 동네 사람들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저희 9남매가 컸어요. 남들이 안 하는 방식으로 살았지만, 주변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방향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사는 걸 봐왔어요.” 부친 우차삼씨가 1962년 대통령에게 받았다는 표창장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내각사무처장 김병삼씨의 직인이 찍혀 있는 공로 표창장은 어제 받은 것처럼 깨끗했다.

―부모와 대화가 많았나요.

“남들보다야 많았지만, 그 시절이 그런 때였나요. 머리 때문에 혼나기도 하고. 그래도 제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셨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을 따져보고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제가 엉뚱하게 살면서도 어긋나지 않은 건 부모님 덕이 가장 커요.”

―지금은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나요.

“자식 걱정, 손주 걱정. 손주만 50명쯤 됩니다. 명절이면 세뱃돈으로 어머님께 1000만원쯤 드립니다. 용돈을 챙겨드리면서 어머님이 직접 손주들 세뱃돈도 줄 수 있으니 기분이 더 좋지요. 제가 지금 효도라고 할 수 있는 게 사실 많지가 않아요.”

100세를 앞둔 그의 노모가 수화기 너머로 얘기한다. “우리 아들 이야기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어머니 목소리 곱지요. 귀도 먹지가 않으셔서 얘기도 잘하시죠?” 그는 이날 노모 예찬만 30분을 더했다. 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마 그의 자식들도 아버지가 사는 법을 보고 배울 것이다.




[김아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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