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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흙과 나무의 빛깔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나?...윤형근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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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추상화가 윤형근은 나이 마흔 다섯에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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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그림일수록 어렵다."
화가 윤형근(1928~2007)이 1977년 일기에 적은 글이다. 당시 그의 나이 만 마흔아홉이었다. 73년 고등학교 강단을 떠나 마흔다섯에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이후에도 그는 "예술이란 (힘이나 지략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가슴으로만 이루어지는 것"(1980년 7월 5일 자)이라고 썼고, "쉬운 길, 가까운 길을 택하면 예술은 나오지 않는다"(1986년 9월 19일 자)고 적었다.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한국 단색화의 거목(巨木) 윤형근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작가의 미공개작 등 작품 40여점과 드로잉 작품은 물론 일기 등을 공개하며 그동안 윤형근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다. 관람객의 입장에선 '반전'을 경험하게 되는 흥미로운 전시이기도 하다. 대형 화폭에 담긴 색면은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한데, 이 작품들이 내밀하고 진솔한 얘기를 쏟아내는 것과 같은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다. 하고픈 이야기가 너무 많아 작가가 화면에 꾹꾹 눌러 담은 '침묵'이 전하는 이야기다.

윤형근의 일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의 답이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싹 빼버린 추상회화"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핵심을 찌르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무와 흙, 돌이 지닌 아름다움에 견줄 것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것, 그리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을 자신의 화폭에 담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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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드로잉, 1970, 종이에 유채, 32x25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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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살이, 울분과 독기
192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윤형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청년기를 보냈다. 청주상고를 졸업한 뒤 금융조합에 취직했으나 금세 일을 그만두고 집을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해방 후 서울대 미술대학에 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지만 얼마 못 다니고 제적당했다. 미군정이 주도한 '국립 서울대 설립안'(일명 국대안) 반대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 피란 가지 않고 서울서 강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엔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복역했다. 1973년 숙명여고 미술 교사로 일하던 때엔 중앙정보부장이 개입한 부정입학 학생의 비리를 따졌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그가 자신의 색깔로 작품을 시작한 것이 이 일을 겪고 난 후부터다. 윤형근은 "1973년부터 내 그림이 확 달라진 것은 서대문교도소에서 나와 홧김에 한 것이 계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색채가 싫어졌고 화려한 것이 싫어졌다는 그는 "독기를 뿜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뮤지엄 산 관장)씨는 "그의 언급대로 독기를 뿜어낸 것이 변혁을 이끌었다. 우직할 정도로 하나의 방향을 고수하는 기질이 그의 독자적인 색면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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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가 사망하기 전 1974년 7월 자신이 아끼던 제자이자 사위인 윤형근에게 쓴 마지막 엽서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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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라는 이름의 큰 산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환기(1913~1974)는 윤형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윤형근은 김환기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나이 차이가 열 다섯살밖에 나지 않지만, 그는 김환기를 '아버지'라 불렀고, 김환기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입원해 있던 미국 뉴욕의 병원에서 마지막 엽서를 그에게 부쳤다.

김환기는 윤형근에게 작품의 출발점이자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재였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윤형근의 초기 작품은 푸른색 계열을 기본으로 하는 서정적인 추상화였다"며 "색채 감각과 질감 표현 등에서 김환기 작품과 매우 닮은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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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1974년 아틀리에의 윤형근. 오른쪽으로 김환기의 작품 '더이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보인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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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유한 작품 세계를 찾고 싶었던 윤형근에게 김환기는 '도전' 대상이기도 했다. 윤형근은 김환기의 작품을 가리켜 "(그의 작품은) 잔소리가 많고 하늘에서 노는 그림"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잔소리를 뺀 외마디 소리를 그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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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다색, 1980, 마포에 유채, 181.6x228.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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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의 광주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1980년 6월에 그린 '다색'이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이다. 작가가 5월 광주 소식을 듣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당으로 나가 그린 것으로, 커다란 천 위에 비스듬히 쓰러지는 큰 기둥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천 위에 오일과 물감이 번지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효과가 더욱 극적으로 보인다.

미술사학자 김현숙씨는 "(윤형근은) 아물지 않은 생채기를 마주해야만 울분이 해소되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화면에 흑색 기둥을 세웠다"며 "('다색'에서) 기둥들은 평소와 달리 검정색 피를 흘렸다"고 썼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이 작품은 "서로 기댄 채 쓰러져가는 인간 군상을 연상시킨다"며 "작가의 일평생 작업 중 가장 감정을 크게 드러낸 작품에 속한다"고 말했다.

80년대 후반 이후 윤형근의 작품은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면은 더욱 단순해지고 색채는 검은색의 변주가 아닌 ‘순수한 검정’에 가까워졌다. 당시 윤형근과 가까웠던 조각가 최종태(86)씨는 "윤형근 선생의 그림은 뜻 그림"이라며 "그의 내면에는 험준한 산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어찌 다 화면에 옮기겠는가. 그의 화면은 단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무와 흙, 자연의 빛깔
윤형근은 화면에 흙의 정취를 담고 싶어 했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스스로 '천지문'이라고 명명한 그는 캔버스가 아닌 면포나 마포 그대로의 표면 위에 청색과 암갈색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으로 작업했다. 77년 일기에 "언제부터 흙 빛깔이 좋아졌는지 잘 기억은 안 난다. 나무 빛깔도(…)돌의 빛깔도 그렇다"고 적었다. 이것이 "오랫동안 몸으로 맞은 바람과 서리(風霜)의 역사를 말해주는 아름다움"이고, "흙이 되어가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2004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일도 죽고, 한창기도 죽고, 조셉 러브도 죽고, 도널드 저드도 죽고, 황현욱이도 죽고, 나만 지금껏 살아 있고나. 내가 좋아하던 친구들은 다 죽었구나."


그리고, 2007년 그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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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다색, 1988-1989cm, 마포에 유채, 205x333.5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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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12월 16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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