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6 (화)

[판결디테일]가수연습생은 이기고, 수행비서는 진 이유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위력에 의한 간음’ 판단핵심은 ‘신빙성’
‘가수 연습생 성추행 사건’에서는
1심 무죄 → 2심 유죄

조선일보

안희정(오른쪽) 전 충남지사와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 안 전 지사는 김씨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를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조선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진술의 신빙성(信憑性). 범행이 내밀하게 이뤄져 ‘증거’가 잘 남지 않는 뇌물죄와 성범죄 관련 사건에서 ‘신빙성’ 무게는 더 커진다. '비서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53)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것도 법원이 피해자인 수행비서 김지은(33)씨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 1심 재판부인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는 지난 14일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기본적인 위력관계는 존재”한다면서도 “개별 사안에서 위력을 행사했는지” “여러 정황 증거를 종합해보면 이를 그대로 신빙하기 어려운 사정이 다수 존재한다"고 했다.

이 판결이 나오자 “장애인이나 미성년자가 아니면 ‘위력에 의한 성폭행’을 인정받기 어렵다” “우리 법원이 ‘위력’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우리 현행 법으로는 ‘위력에 의한 강간’을 처벌하기가 정말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연습생 박씨 사건은 어떻게 가해자 유죄?
연예기획사 대표 정모(49)씨는 지난 2014년 자기 회사 소속 가수 연습생 박모(33)씨와 술을 마신 승용차 안에서 “사귀어 보고 싶다”며 박씨를 끌어안거나 “가슴 수술한 적이 있는지 확인해보겠다”며 가슴을 만지는 등 강제추행한 혐의를 받았다. 정씨는 또 같은해 8월 노래방에서 박씨에게 “방송 출연 전에 끼를 테스트 해봐야 하니까 관객을 유혹하듯 엉덩이를 흔들어보라”며 박씨에게 춤과 노래를 시킨 뒤 뒤로 다가가 가슴을 만지며 성추행한 혐의도 있었다. 그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안 전 지사 사건과 같이 결정적인 물적 증거는 없는 상태였고, 피해자의 주장과 주변인들의 증언 등이 전부인 사건이었다.

정씨 역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 재판부는 "박씨가 정씨 회사 소속의 연습생이 되고서 추행을 당했다고 하면서도 (이 회사 소속으로) 군부대 행사 등을 했고, 전속 계약까지 체결한 점 등으로 봐서 박씨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박씨가 당시 정씨를 고소하기 직전까지 남자친구나 가까운 동료들에게 피해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점 등도 석연찮다고 봤다.

안 전 지사 사건의 1심 재판부도 “김지은씨가 성폭행을 당한 뒤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찾아 함께 식사를 하거나 와인바에 간 점 등은 일반적인 성폭행 피해자들의 행동과 다르다”며 김씨의 피해 주장을 신뢰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정씨 사건은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연습생 박씨는 항소심에서 “당시 30대로 연습생으로서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정씨와 성적 접촉이 있었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나이 어린 연습생들의 비난을 견딜 수 없었다"며 "연예인 지망생으로서 성추문이 발생하게 되면 장래에 상당한 악영향이 예상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추행을 당한 사실을 외부에 발설할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재판부는 박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진술이 상식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사회통념상 납득이 가능하다”고 했다. 또 박씨가 남자친구에게 추행당한 사실을 털어놓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능한 사정으로,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만한 정황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박씨가 수사기관에서부터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피해 주장이 달라지거나 오락가락하지 않고 일관되게 진술한 점도 신빙성을 높이는 근거가 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정씨에 대해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4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조선일보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해 지난 14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직후 여성단체가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뉴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심리전문가 동원한 법원 ‘진술 신뢰성 떨어진다’ 판단
김지은 씨는 연습생처럼 2심을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안 전 지사 사건도 항소심에서 김지은씨 진술의 신빙성이 얼마만큼 인정되느냐에 달렸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김씨가 안 전 지사와 나눈 텔레그램 대화 내용을 일부 삭제한 점, 김씨와 다른 증인과의 진술 내용이 엇갈리는 점, 안 전 지사와의 성관계 직후 김씨가 보인 행동, 주변인들에게 보낸 카카오톡 대화 내용과 김씨의 주장이 다른 점 등을 1심 법원이 김씨 진술의 신뢰도가 낮다고 판단한 부분이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yes means yes),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은 성관계(no means no)를 성폭력을 인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진실해야 한다”면서 “1심에서 심리전문가까지 동원해 피해자의 심리상태까지 살폈는데도 김씨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항소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했다.

반면 검찰은 김씨의 신빙성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1심 선고 이후 검찰은 "김씨는 피해 사실을 일관되게 진술했고, 안 전 지사의 요구에 거부 의사를 표시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 사실을 여러 사람에게 호소했다"며 "여러 증거에 의해 김씨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오경묵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