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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리더십의 달인들 ‘유비, 세종대왕, 강희제’ 힘과 권위가 아닌 원칙과 관용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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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 누릴 수 있는 ‘복’ 중 최고봉은 ‘상사 복’이다. 인품과 실력을 겸비한 상사를 만나는 것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한 인연인 셈이다. 사실 이 정도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진상 짓 않고 ‘제 역할에 맞는 일만 해도 다행이다’ 싶은 수준의 상사, 의외로 많다. 진상 상사 덕에 부하 직원은 매일 야근, 특근에, 부서 평가는 꼴찌. 게다가 ‘마이너스의 손’인 상사로 인한 실패의 결과물을 설거지하느라 부하 직원은 갖은 애를 쓰는데, 상사는 알량한 권위나 내세우고 ‘갑질’을 해 댄다면…. 만약 당신이 이런 평가와 대접을 받는 상사, 리더라면 일찌감치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게 모두를 위해 올바른 선택이다. 리더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조직원의 헌신적이고 능동적인 노력, 충성, 열정이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리더로서 평가받고 다음 자리를 노릴 수 있다. 세상에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것은 없다. 나는 움직이고 않고 상대를 뛰게 하고, 나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에게 공부하라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리더는 부하보다 더 헌신하고, 실천하고, 노력하고, 공부하고, 고뇌해야 된다.

역사의 빛나는 주인공 가운데 필자는 가장 완벽한 리더십의 표상으로 유비, 세종대왕, 강희제를 손꼽는다. 이들이 활약했던 공간과 상황은 각기 다르지만 이들이 보여 준 리더십은 지금도 많은 학자, CEO들이 가장 본받고 싶고 흉내라도 내 보려는 롤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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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서번트 리더십의 완벽한 모델

유비 리더십의 정체는 ‘서번트 리더십’ 즉 ‘섬김과 겸손의 리더십’이다. 모난 돌이 정 맞고, 갈대는 휘지만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정에 맞고, 부러져야 할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겉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않지만 휘거나 굽히는 모양새도 필요하다. 목표를 향해 꾸준히 걸어가며 자존감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겸손과 굽힘의 유연함을 갖추는 것이다. 그 표본이 바로 <삼국지>의 영웅 유비다. 알고 보면 그는 참으로 많은 이에게 머리를 숙였다.

유비는 열악한 환경에, 가진 것도 없는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대대로 금수저인 오나라 손권, 재력가이자 세력가인 조조와 맞설 수 있었던 비결은 리더십에 있다. 유비는 공손찬, 도겸으로 시작해 조조와 유표 등 많은 사람에게 머리를 굽혔다. 하지만 결코 추하거나 비굴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가 세의 불리를 인정하고 머리를 굽힌 것이지 무조건 복종하기 위해 강한 자에게 신하의 예를 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비에게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한 황실의 종친으로 황실을 부흥하겠다는 그의 대의는 사람을 모을 수 있었다. 유비는 큰 목표를 위해 작은 이익이나 체면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또 그는 신의를 지켰다. 제갈량이 유비가 신세를 진 적 있는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자는 계책을 냈다.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지만 유비는 제갈량의 제안을 거부했다. 대의명분에 어긋난 일이라며.

유비의 촉나라는 국력에서 위나라의 10% 정도에 불과했다. 물자, 사람, 군대 등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유비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인재 등용과 그들의 자발적인 충성심 유도였다. 그것은 국가와 자신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일. 유비는 겸손과 신의,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머리를 굽히는 처세학을 바탕으로 리더십을 펼쳤다. 유비야 말로 ‘실리 추구 리더십’의 대표 인물이다.

그의 겸손과 굽힘 리더십의 결정체는 제갈량을 얻을 때다. 당시 유비는 제갈량보다 스무 살 연상이었다. 그럼에도 유비는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가 머리를 숙였다. 세 번째는 낮잠을 자는 제갈량을 몇 시간 동안 서서 기다리며 제갈량의 마음을 얻었다. 또한 유비는 나이, 신분, 부, 출신 지역 등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그리고 인재를 얻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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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의 힘

유비의 본모습을 말해 주는 일화는 많다. 촉의 오호장 중 한 명인 마초와의 일이다. 서량 귀족 출신 마초는 유비에게 복종했지만 마음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유비를 ‘현덕공’이라 부르며 은근히 유비와 자신의 출신 성분을 비교했다. 하지만 유비는 그런 마초를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한결같은 자세로 받아 주었다. 결국 마초는 유비의 너그러움에 감동하여 호칭을 바꾸고 유비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했다.

또 있다. 유비가 도망갈 때 그의 일점혈육인 아들 유선과 부인 두 명이 그만 유비의 본진에서 이탈했다. 조자룡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 유선을 품에 안고 적의 창검을 뚫고 빠져 나오는 데 성공했다. 피투성이의 조자룡이 품에서 유선을 꺼내 유비에게 안기자 유비는 바로 유선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이런 아둔한 아이 때문에 나의 장수를 잃을 뻔했다”는 말과 함께. 조자룡은 눈물을 흘렸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했다. 이처럼 유비는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런 겸손과 후덕함이 바로 감성 리더십의 기본이다. 감성 리더십은 유능한 인재를 모으고 단결시킬 수 있는 힘이다. 즉 자기 수양의 모습을 보이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의 마음과 행동 그리고 실천적 자세를 얻어 내는 고도의 리더십인 것이다.

한때 ‘서번트 리더십’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말 그대로 ‘하인 리더십’ 또는 ‘섬김 리더십’이다. 상사의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조직원과 눈높이를 맞추며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의 마음에서 조직의 명령을 읽어 내는 것. 이런 서번트 리더십이 조직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리더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말로만 부하 직원의 입장을 알아주는 척하는 것은 일시적인 눈속임이다.

유비는 서번트 리더십의 전형이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 때문에 행군이 늦어져 조조군에게 덜미를 잡힐 뻔 한 적이 있다. 참모들은 백성들을 떼어 놓고 먼저 행군하자고 건의했지만 유비는 “나를 따르는 백성들을 어찌 버린단 말인가. 내가 비록 조조에게 붙잡혀 불리한 신세가 된다 해도 백성들과 같이 가겠다”는 말로 참모들의 건의를 물리쳤다. 이처럼 유비는 머리를 숙일 때와 신의를 지킬 때 그리고 강인함을 표출할 때를 누구보다 잘 아는 리더였다.

조직에서 리더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조직이 가야 할 방향과 목표의 제시자로서, 또는 날카롭게 대립되는 의견과 역할의 조율자로서, 그리고 조직원의 아픔과 어려움을 읽어 내고 해결할 수 있는 조력자로서, 다양한 능력이 리더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세종대왕–끝없이 정진하는 실력의 리더십

세종대왕은 말이 필요 없는 성군이자 리더십의 완성체다. 조선의 모든 왕이 세종의 정치를 이해하고 실행하려, 또한 흉내라도 내려 노력했다. 특히 정조는 세종에 대한 존경을 넘어서 경외의 마음으로 항상 세종 시대의 재현을 꿈꾸기도 했다.

세종 리더십은 소통과 솔선수범이다. 그는 정책 하나도 왕의 위세로 집행하지 않고 타협과 소통 그리고 솔선수범으로 정착시켰다. 이를 위해 그는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을 단련하고 괴롭혔으며 그의 이런 마음가짐과 실천은 한 번의 어긋남 없이 재위 32년 동안 계속되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장남인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쫓겨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 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정치적 풍파와 정적의 공격을 받았다. 호랑이 성정의 부왕 태종에게 엄격히 교육받았고, 적통 후계자를 대신해 왕위에 올랐기에 모든 일에 스스로를 경계했다.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임명한 날 밤새 통곡했고,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세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왕자 시절부터 학문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특히 책과 독서를 좋아해, 세종은 책을 읽는 데 열중했고 특히 어떤 책은 1000번을 정독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왕자의 건강을 걱정한 태종이 ‘독서 금지령’을 내리고 신하들에게 책을 숨겨 놓으라고 명할 정도였다. 세종의 학문에 대한 열성과 노력은 공부를 하는 자체에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책과 경전 그리고 성현의 말씀과 철학은 물론이고 현실적인 학문에도 세종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의 박식은 음악, 과학, 무기 제조, 인쇄 등 국가 경영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부분까지 다양하게 발휘되었다.

태종이 죽은 후 1인자가 된 세종이 내린 첫 번째 명령은 화합이었다. 세종은 자신의 세자 임명을 반대했던 황희를 불러들였다. 세종은 보복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 태종이 죽은 당시 조정에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유장현이 남아 있었다. 모든 신하가 태종의 위세에 눌려 심온 처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유장현은 강하게 심온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신하들은 세종의 장인을 죽이고 형제자매를 관비로 전락시킨 유장현이 살아남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심온 사건을 거론하는 것을 기회로 세종이 신하들의 이른바 군기를 바짝 잡아 왕권을 강화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세종은 유장현을 좌의정으로 중용함으로써 자신의 반대파를 강하게 껴안는 포용의 정치, 배려의 정치, 인의의 정치를 실천했다.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큰 틀에서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세종 리더십에서 또 하나의 보석 같은 결정체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용인술이다. 관료 조직에 황희 등 노련한 대신 세력과 집현전 출신의 젊은 인재들을 등용, 신구의 조화와 힘의 균형을 꾀했다. 그리고 인재의 특성을 파악해 전문 직책을 맡김으로써 조직을 효율적이고 완벽하게 운용했다. 매사에 ‘좋은 게 좋은 것이다’는 이미지의 황희 정승은 알고 보면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청렴성이 돋보였고 행정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그런 황희에게는 인사와 행정 그리고 재정을, 감수성이 풍부하고 어질었던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문화를, 융통성이 뛰어나고 순발력이 강했던 윤회에게는 외교를, 강직한 김종서에게는 국방을 책임지게 했다. 이처럼 세종은 신하의 특성을 파악해 그들이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 같은 리더십이 가능했던 것은 세종의 실력을 바탕으로 한 전문성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2시가 넘어 취침할 때까지 세종은 공부와 경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세종은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고질적인 안질환이 심해져 재위 말년에는 앞에 서 있는 신하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혈관 질환에 당뇨, 각종 풍으로도 고초를 겪었다. 그럼에도 세종의 백성을 위한 리더십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가뭄이 계속되어 수많은 백성이 초근목피로 연명하자 세종은 이를 자신의 부덕으로 여기고,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친 채 경복궁 경회루 옆에 초가집을 짓고 무려 2년4개월을 기거하며 백성의 아픔을 함께했던 사실은 지금도 감탄하는 솔선수범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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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귀를 열고, 입은 닫아라

또한 세종 리더십의 기본은 말과 행동의 일치다. 세종은 제도와 정책을 시행함에 이른바 예행 연습을 통해 실수와 폐해를 줄이려 노력했다. 언행을 조심하고 겸손하게 함으로써 신하들 특히 반대파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종에게 본받아야 할 리더십은 성실함과 솔선수범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초가집을 지어 기거하고 반찬 개수를 줄이는 등 과도할 만큼 자신의 행동을 통제했다. 이는 왕으로서 정치적 쇼가 아닌 진심으로 백성을 위하는 그의 성실성과 마음의 표출이었다.

이런 세종 리더십의 바탕은 바로 지식의 힘이다. 세종은 단순한 생각과 즉흥적인 발상에서 명령을 내리거나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토론을 통해 균형감을 갖추고 그것을 공론화해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심사숙고하게 하고 이를 바르게 쓰는 데 자신의 폭넓은 지식을 적용했다. 세종은 항상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지적해 달라.” “백성들이 어디가 아픈지 알려 달라.”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함께 만들어 가자.”

직장에서 세종과 유사한 리더십을 찾거나 바랄 수는 없다. 세종의 리더십은 독보적이고 헌신적이며 본인에게는 대단한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의 수많은 리더십 중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것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리더의 모습이다. 공부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흐름도 모른 채 알량한 경험 하나로 판단하고 지시하는 상사, 요즘도 많다. 모두가 그를 보며 ‘저 사람은 끝물이군’ 하고 생각하는데 본인만 ‘역시 나의 연륜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해’라며 혼자 자뻑 놀이를 하다 옷을 벗는다. 공부하지 않는 리더는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또한 리더는 세종처럼 솔선수범해야 한다. 리더는 전쟁터의 지휘관처럼 앞장서서 전진해야 하고 힘든 일이나 빛나지 않을 일도 함께해야 한다. 본인은 뒤에 숨어 팀원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다 ‘잘되면 본인 덕, 안 되면 직원 탓’을 한다면 그는 팀원은 물론 경영진에게 결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왕으로 32년을 살다가 54세에 생을 마친 세종. 그는 모든 면이 완벽한 리더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단 하루도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 못한 불행(?)한 왕이기도 했다. 그렇다. 리더는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는 일보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리더의 고민은 오늘도 계속된다. 당신이 지금 회사 일로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리더로서 첫 번째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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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한 순간도, 한 조각도 소홀치 않는 섬세함

중국의 역대 황제 230여 명 가운데 유일하게 ‘천 년에 한 번 나옴직한 제왕’이란 뜻의 ‘천고일제千古一帝’ 호칭을 얻은 강희제. 그는 중국 역대 황제 중 재위 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기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오랫동안 천하를 통치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중국 지도자들조차 가장 본받고 싶어 하는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한 주인공이 된 것은 한마디로 ‘피를 토할 정도로 노력하는 리더’였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1654년 북경 자금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 3대 황제 순치제. 청나라는 태조 누르하치를 거쳐 태종 홍타이지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순치제가 북경에 입성하면서 나라의 틀을 잡아나갔다. 당시 만주족 인구는 약 100만 명. 강력한 기병의 일당백 용사들로 이루어진 팔기군 15만 명이 청나라 국력의 전부였다. 그런 청이 약 1억5000만 명의 명나라를 무너뜨린 것이다. 과연 정복은 했지만 거대한 중원과 한족을 통치하고 군림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청 왕조의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순치제는 사랑했던 후궁의 죽음으로 의욕을 잃고 정사마저 멀리하다가 천연두에 걸려 23세에 요절하고 만다. 순치제에게는 다섯의 이복 왕자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현엽을 가장 총명하게 보았던 순치제의 어머니인 효장태후의 지원과, 현엽의 생모가 후궁에서 황후로 추존되어 서열이 앞서게 되자 현엽이 황제가 된다. 바로 그가 강희제로, 당시 불과 7세였다.

황제가 어리면 모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강희제의 생모는 일찍 죽었다. 황태후는 4명의 대신에게 강희제를 보좌해 정사를 돌보도록 위임했다. 이들이 바로 색니, 오배, 소극살합, 알필륭이다. 이 중에서도 군권을 장악한 오배가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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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함과 유연함을 동시에 발휘하라

만주족은 14세가 되면 직접 정사를 돌보는 전통이 있었다. 14세가 된 강희제에게 대신 넷은 강력한 벽이었다. 강희제는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 권력 집합체의 분열을 시도했다. 하지만 색니가 죽자 오배는 누명을 씌워 소극살합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강희제는 오배와 정면 승부를 결정했지만 할머니 효장태후의 만류로 힘을 기르는 데 집중했다.

그 첫 번째가 친위대를 만든 것. 그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를 수장으로 선복영이라는 친위 조직을 양성했다. 1669년, 17세의 강희제는 거사를 행한다. 오배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전언을 보내고 오배가 방심한 채 들어오자 선복영의 무사들을 매복시켜 그를 잡았다. 알필륭도 마찬가지다. 강희제는 30가지의 죄목으로 오배에게 30번의 처형을 명령할 수 있었으나 선대의 공을 생각해 재산을 모두 빼앗고 유배를 보냄으로써 강력한 황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오배보다 더 강력한 세력이 강희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청의 개국 공신 한족 출신 세 번왕으로 오삼계, 상가희, 경충명이다. 이들은 영지에서 사병은 물론 재정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하며 청나라 안에 또 다른 세 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강희제는 이들을 제거하고 진정한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상가희가 은퇴를 청원하며 아들에게 왕위를 세습하게 해 달라고 청원하자 강희제는 ‘은퇴는 허락하되 세습은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자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세력이 너무 막강해 강희제의 측근들조차 정면 승부를 주저할 정도였다.

강희제는 강한 의지로 무려 9년간의 전쟁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번왕들의 기세가 드셌다. 하지만 강희제는 포기하지 않고 전투를 지휘해 승기를 잡아 나갔다. 이때 강희제가 세운 전략은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당근과 채찍’이다. 반란군에 강하게 응전했지만 항복하면 모두 용서하고 재산과 목숨을 보존해 준다는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점차 명분과 세력을 잃어 가던 반란군이 강희제에게 항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강희제가 실제로 항복한 장수와 병졸을 보호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을 보며 강희제에게 신뢰가 생긴 것이다.

두 번째 전략은 한족 출신 장수를 선봉에 세운 것이다. 단순히 방패와 화살막이 역할이 아닌 한족 출신 번왕들의 심리와 전략을 같은 한족 출신이 더 정확하게 파악하리라는 계산이었다. 이렇게 세 번왕의 반란을 진압한 강희제는 타이완의 정 씨 가문을 토벌해 타이완을 푸젠성의 지휘 하에 두었다. 그리고 러시아 표트르 대제와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현재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을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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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권위가 아닌 원칙과 관용의 리더십

많은 전쟁을 치른 끝에 강희제는 이른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33년간의 태평성대인 ‘강건성세’를 열었다. 그는 한족 말을 익히기 시작했다. 한자를 몰라도 되는 황제의 위치였지만 언어부터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강희제는 황제가 되고 명나라의 마지막 과거 시험 장원 급제자인 제세를 첫 번째 스승으로 임명했다. 또한 황하와 장강 치수에도 힘을 쏟았고 무려 일곱 번이나 강남을 순행하며 한족 유학자와 백성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했다. 심지어 명나라 시조 주원장의 사당을 방문해 절도 했다. 민심은 조금씩 강희제의 진심을 알아주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절제와 청빈의 모범을 보였다. 명나라 시절 무려 1만 명이 넘는 환관과 궁녀를 정리해 400여 명으로 줄였다. 강희제 침전을 시중드는 내관도 1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강희제는 “궁궐에서 쓰는 모든 비용은 백성의 피와 땀이다. 나부터 근검절약 해야 한다”며 백성 사랑을 실천했다.

또한 그는 다양한 학문에 넘치는 호기심을 보였다. 서양 선교사들에게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들로부터 천문학, 수학, 과학을 공부했고 한족 출신 유학자들에게는 주자학과 유학을 배웠다. 한때는 너무나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피를 토했다고 한다.

강희제의 통치 이념은 공자와 맹자의 이론을 주축으로 한 ‘왕도정치’와 노장사상에 기반을 둔 이른바 ‘무위지치無爲之治’였다. 무위지치는 ‘다스리는 것을 백성이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권위의 정치가 아니라 제도와 원칙을 확립하고 그 룰 안에서 자연스럽게 통치하는 것이다.

이는 직장 생활에도 필요하다. 강력한 CEO나 부서장의 리더십도 필요하지만 조직원이 눈에 보이지 않는 룰과 원칙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창의성과 노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항상 ‘돌격 앞으로’ 같은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가 수치화 되고, 그 수치화가 개인의 능력을 판단하는 자료가 되는 조직에서는 직원들의 자발적 열성과 창의성이 발휘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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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노력하고 행동하라

강희제 리더십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국궁진력鞠窮盡力’이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진정 몸을 굽혀(국궁), 최선을 다해 모든 힘을 쏟아 붓는(진력) 것이다. 강희제는 신하들에게 “나는 하늘의 신하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당신들은 퇴근해 쉴 수도 있고 은퇴하면 손자와 놀 수도 있지만, 나는 단 하루도 쉴 수 없는 제왕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며 마음가짐을 피력했다. 또한 평소 “제왕이 오늘 한두 가지 일을 미루면 내일 한두 가지 더 미루어야 할 일이 생긴다. 그러므로 오늘 할 일은 단 한 가지도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실제 하루에도 200~400여 개의 상소문, 보고서를 직접 다 읽고 처리해, 그의 노력과 자기 절제는 끊임이 없었다.

무려 61년을 통치한 강희제. 당연히 나라는 융성해지고 백성의 삶은 즐겁게 변해 갔다. 하지만 강희제의 마음에 어둡게 자리 잡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만주족과 한족의 진정한 통합이었다. 강희제는 마음을 여는 방법을 고민했다. 우선 궁중이나 귀족에게 한자를 쓰게 했다. 또 하나 방법으로 만주족과 한족이 향음주례를 같이 열 것을 명령했다. 살아온 전통이 다르고 그로 인해 조상신을 숭배하는 방법이 다른 두 민족에게는 상당히 불경한 짓을 저지르는 셈이었다. 강희제는 반발을 제압하고 만주족 음식과 한족 음식을 한 상에 올리라고 지시했다. 요리법, 색상, 맛과 향 등으로 분류한 총 108가지의 음식이 차려졌다. 궁궐로 초대된 만주족과 유학자들은 음식을 맛보며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만한전석滿漢全席’의 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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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보다 덕으로 지휘하라

강희제는 세심한 인물이어서 백성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문제도 고민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당연히 벌을 내렸지만 사형에는 신중했고, 훗날 “어떻게 하면 형벌을 낮출 수 있을까 수없이 생각했다”고 피력했다. 10월부터 1월까지는 유배도 금했다. 추운 겨울에 헐벗고 굶주리고 약한 몸으로 유배를 가는 것은 가혹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참으로 어질다는 표현 외에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강희제 재위 61년은 그가 1717년 쓴 <고별상유>에 나오는 글귀처럼 치열한 자기와의 투쟁이었다. 강희제는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후대에 우환을 남긴다”는 말과 함께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해 정사를 돌본 마음을 남겼다.

강희제를 보며 세종대왕이 떠올랐다. 강희제보다 200년 앞선 세종대왕의 삶과 리더십이 강희제의 그것과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한 순간도 백성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문무겸전의 풍부한 학식, 적을 포용하는 관대함과 겸손함, 근검절제의 생활, 인재 발굴에 대한 열의, 후계자 문제를 고민한 말년까지 말이다. 한 사람은 조선의 위대한 성군으로 지금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고, 또 한 사람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까지 본받아야 할 제왕으로 손꼽는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나보다 남을 위하고,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고민했다는 점이다. 또한 끝없는 정진과 자기 단련 그리고 치열한 자기 통제가 위대한 리더십으로 발휘 된 것이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가 되고 싶다면, 그것도 좋은 리더가 되고 싶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정확한 자기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부와 자기 고민이란 힘든 과정이 있어야 나오는 결과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위키피디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42호 (18.08.2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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