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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1만 세입자 어디로...' 상생 아쉬운 청계천 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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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 대책 없는 허울뿐인 '도심재생' 비판 목소리
문화·미래적 가치 충분.. '상생 방안' 찾아야


파이낸셜뉴스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설정돼 재개발이 진행 중인 입정동 일대에 세입자 대책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사진=조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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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공구거리’로 유명한 서울시 중구 입정동 일대는 1953년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공구산업의 태동지로 6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기계부품 정밀 가공 기술을 배운 기술자들이 한국전쟁 이후 이곳에 모여들었고, 산업용 제품 전반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도심 제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난 2006년 서울시가 이 지역을 포함한 세운상가 일대를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했고, 수천에서 1만여 명에 달하는 종사자들이 일하는 공구거리 상권은 현재 171개로 구역으로 나뉘어 재개발에 들어갔다.

서울에는 33개 재정비촉진지구가 있다. 옛 상가를 없애고 주상복합 아파트 3개동이 들어설 예정인 세운상가 일대(3-1, 3-4, 3-5구역)는 거대한 재개발 계획의 시작이다. 유락희 청계천 상권수호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아직 재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했는데 시행사에서 손배소, 형사소송 등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세입자들은 권리 보호를 위해 비대위를 결성해 대응하고 있다.

■철저한 협업 관계…흩어지는 순간 폐업 예고
입정동 공구거리는 ‘협업’을 통해 구축된 상권이다. 한쪽에서 부품을 깎으면 다른 쪽에서 연마하고, 도장업체로 옮겨 색칠하는 식으로 여러 업체가 합력해 완성품을 만들어낸다. 완성된 제품은 전국 거래처로 유통되며, 인근 판매상들이 구매해 팔기도 한다. 공구 생산을 위한 명확한 생태계가 조성된 것이다.

유 위원장은 “2003년 청계천 재개발 당시 타 지역으로 나갔다가 폐업하거나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한 펌프 판매상은 젊었을 때 일한 가게를 퇴직금 대신 인수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는 “청계천은 협업 관계고 상권이 밀접하게 형성돼있어서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순간 폐업할 곳이 많다”고 전했다.

해당 지역 지주와 건물주들은 보상을 받았지만 세입자들을 위한 대책은 부족하다. 상인들은 재개발 계획이 확정된 이래 2년 넘게 세입자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 중구청, 시행사는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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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정동 일대 세입자들이 서울 중구청 앞에서 재개발 반대 집회를 갖고 있다. /사진=조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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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부지 대책 미비…‘협업 생태계 유지해야’
세입자들은 ‘대체부지’를 요구하고 있다. 거래처를 일부 포기하더라도 협업 생태계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45년째 청계천에서 정밀가공으로 삶을 꾸리고 있는 김모 씨는 “세금도 꼬박꼬박 냈고, 불법으로 일한 것도 아니다”라며 “상권을 우리가 만들었는데 아무런 대안도 없이 나가라는 게 무슨 경우냐”라고 한탄했다.

유 위원장은 “과거 SH나 LH는 대체부지를 마련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공익개발이라며 민간 시행사에 재개발 권한을 줘 대체부지 의무를 없앴다”고 말했다. 민간 시행사는 2년짜리 임시영업장 20%만 해주면 된다.

중구청은 “임시영업장 및 도심특화산업 수용면적을 확보해 이주시킬 계획이 있다”고 밝혔지만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진다.

유 위원장은 “3-1구역만 300여 상가가 있는데 건폐율을 제외한 부지 면적을 따져보니 42.5평 정도였다. 10곳도 못 들어가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 세입자는 “제3자가 봤을 때 도심 지역 재개발을 바라는 건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여기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도 챙겨서 (재개발을) 진행해달라는 거다”라고 말했다.

■‘기준이 무엇인가’.. 투명하지 못한 감정평가
세입자들은 시행사의 영업손실보상 감정평가가 투명하지 못하다고 입을 모은다. 20년 동안 특수칠 업장을 운영한 세입자는 “2년 치 폐업보상이 4개월 치 휴업보상보다 30%만 많다”라고 황당해했다. 휴업과 폐업을 떠나 기간만 따져도 보상액을 30% 더 준다는 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유 위원장은 “시행사는 도정법을 기준으로 감정평가를 한다고 말한다”며 “사업장이 이 자리를 떠났을 때 영업 손실이 얼마나 발생하는지 제대로 고려해야할 것”고 말했다. 상인들은 가게 규모, 시설이 크게 차이나도 같은 계통이라고 보상액이 비슷하게 나오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한 세입자는 “큰 걸 요구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생존을 위한 대안을 마련해달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보상은 나중 문제고 (감정평가에 대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억울하지 않을 것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이에 대해 중구청은 “영업손실보상액수와 기준이 궁금하거나 평가사 면담을 요구하는 세입자가 의견을 받을 수 있게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화적·미래적 가치 있는 곳…‘상생 방안 찾아야’
청계천 일대는 재개발 대상지이면서 2016년 1월부터 도시 재생을 목표로 추진된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무대이기도 하다. 재개발과 상생의 움직임이 충돌하는 상황. 이 지역에서 50년 넘게 자리 잡은 주물 가게의 사장은 “서울시에서 날 문화적으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며 취재해갔다. 누구는 개발하려고 하고 누구는 보전하려고 한다”라며 딜레마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세운 프로젝트’로 최근 몇 년간 세운상가에는 청년공간이 다수 들어섰다. 청년 기업가, 예술가들은 입정동 상인들과 협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시제품을 만들어볼 수 있는 게 이곳이다. 첫 우주비행 참가자 이소연이 들고 간 ‘등고선 촬영기’가 만들어진 곳이며, 청계천 장인들의 손을 거쳐 세계 유수 박람회에 출품된 작품도 많다. 수십 년 간 쌓인 경험은 청계천에 새 둥지를 튼 청년들의 영감을 실현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입정동을 단순히 과거의 잔재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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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정동 일대에 재개발 과정을 비판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조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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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업가 A씨는 “반만년 역사를 지닌 문화 강국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현대미술 전공자 B씨는 “많은 작가와 미대생들이 작품을 만들어온 공간”이라며 “을지로가 청년공간으로 변하고 있다면 청년과 세입자가 상생하는 방안을 나라가 마련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계공구를 판매하는 한 세입자는 “도심 재생이라면서 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게 정말 재생인지 되묻고 싶다”라고 비판했다.

한편 지난 10일 청계천 상권수호 비상대책위윈회는 서울 삼양동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재개발 계획의 문제점과 세입자들의 입장을 전달한 상황이다.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 정석 교수는 “이제 재개발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많은 곳에서 세입자 보호가 고려되지 않은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세입자에게 선택권이 없는데다 재개발을 마친 곳들의 공실률도 상당해 실효성도 없다”라며 “굳이 필요하다면 현재 묶여 있는 재개발 지역 설정을 풀고 필요한 곳만 건물 단위로 진행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ocmcho@fnnews.com 조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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