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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판사 “예스 민스 예스 룰 없는 한국, 안희정 처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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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서 무죄 판결 근거 뭔가

선진국, 동의없는 모든 성관계 처벌

한국선 폭행·협박 등 유무로 판단

법원, 위력 행사한 증거 부족 지적

“피해자 진술도 의문가는 점 많아”

비서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53) 전 충남지사에게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김지은씨가 자기 나름대로 거절하는 태도를 보였고 내심 반항하는 상황이었다 해도 이런 사정만으로 안 전 지사의 행동을 처벌해야 할 성폭력 범죄로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중앙일보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성폭력 혐의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법원 청사를 나서고 있다. [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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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 일부에선 재판부가 ‘합리적 의심’에 따라 무죄 선고를 내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법원은 ‘합리적 의심’을 없앨 수 있을 만큼 입증이 이뤄지지 않으면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한다. 성희롱 사건을 주로 맡아 온 이은의 변호사는 “‘합리적 의심’ 부분이 형사사건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사회·윤리적으로는 당연히 비난받아 마땅하나 범죄로 처벌될 수 있을 만큼의 입증이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재판부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김씨 진술의 신빙성 문제다. 올해 2월 마포구 오피스텔에서 성관계를 한 것과 관련해 재판부는 “당시 피고인과 피해자가 주고받은 텔레그램 대화는 피해자가 성관계 이후 증거를 모으고 고소 등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게 될 때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인데도 모두 삭제한 정황 등을 볼 때 피해자 진술에 의문이 가는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은 성폭력 처벌 법 체계의 문제다. 현행법상 강간죄는 폭행·협박 또는 위력이 있을 때 성립한다. 이와 관련, 1심 재판장인 서울서부지법 조병구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노 민스 노 룰(No Means No rule)’과 ‘예스 민스 예스 룰(Yes Means Yes rule)’을 언급했다.

‘노 민스 노 룰’은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성관계를 한 경우 이를 강간으로 간주하고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예스 민스 예스 룰’은 한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이 명시적이고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모든 성관계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상대가 분명히 “예스”라고 말했을 때만 합의된 성관계로 인정하는 것이다. 조 판사는 “두 가지 룰이 입법화되지 않은 현행 성폭력 범죄 처벌 법제하에서는 피고인의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현행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상대편 의사가 어땠느냐를 먼저 보기보다는 가해자의 행동(폭행·협박 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처럼 강간의 기준을 협소하게 보고 있는 현행법에 대해선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일부 주)·캐나다와 스페인 등 유럽 10개국에서는 ‘당사자 간 동의’가 없으면 강간죄로 인정하는 취지의 입법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스웨덴은 최근 ‘미투’(#MeToo)의 영향으로 성관계 전 상대방으로부터 명백한 동의를 얻어야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예스 민스 예스 룰’ 법안을 통과시켰다.

최근 국내도 강간죄 처벌 규정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3월 당사자의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형법 개정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김지은씨가 안 전 지사에게 성폭행·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직후였다. 당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출석한 정 장관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경우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보느냐”는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 질의에 “국제기준인 ‘동의가 있었냐 없었냐’를 잣대로 강간 기준을 폭넓게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안 전 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 최주필(법무법인 메리트) 변호사는 “이미 입법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번 선고를 계기로 동의 없는 성관계를 처벌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김한규(법무법인 공간) 변호사는 “합의된 성관계였으나 피해자가 뒤늦게 ‘당시에 거절 의사를 밝혔다’고 문제 삼으면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민희·조한대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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