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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벽돌책] 聖과 俗이 달뜬 활기로 어우러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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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조선일보

장강명 소설가

요한 하위징아의 명저 '중세의 가을'을 흔히 이런 식으로 요약한다.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었고, 르네상스의 씨앗이 이미 그 시대에 뿌려져 있었다'는 내용이라고.

글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썩 제대로 된 요약도 아니다. 이 책은 르네상스의 기원을 찾아내려 애쓴다기보다는 그냥 14~15세기 프랑스와 네덜란드·독일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어떤 풍습을 지녔고, 어떤 문화를 즐겼고, 세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시간 여행을 다녀온 저자가 유려한 문체로 쓴 견문록 같다고나 할까?

'중세의 가을'이 펼쳐보이는 중세 후기는 결코 르네상스의 예고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둠과 광기의 시대도 아니다. 성(聖)과 속(俗)은 달뜬 활기 속에 섞여 있었다. 성지순례는 데이트 여행이었고, 교회 안에서 매춘부가 호객 행위를 했다. 성 유물을 전시하는 건너편에서 알몸 공연이 벌어졌다.

중세인들은 자주 울었고, 쉽게 감동받았고, 잔인했고, 무절제했다. 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은 최고의 구경거리였지만, 사형수의 마지막 참회에는 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 방탕에 가까울 정도로 향락을 즐기는 동시에 종말론과 염세주의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조선일보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이런 모순이 너무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운가?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렸을 때 익히 경험했던 감정 상태였으니까. 그런 순진한 정서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눈물을 부끄러워하고 감정을 다스리고 관용을 미덕으로 받드는 현대가 중세보다 더 기괴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인간 사회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일 수 있다는 발견은 지금 우리 사회의 형태 역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후대인들은 21세기를 돌아보며 어떤 모순을 지적할까. 그들의 눈에는 우리 시대 역시 다른 방향으로 잔인하고 탐욕스럽게 비치는 건 아닐까.

'중세의 가을'은 국내 출판사 세 곳에서 각각 번역본을 냈는데, 연암서가의 776쪽짜리 책이 가장 두껍고 최신 번역이다. 연암서가는 홈페이지도 없이 묵직한 인문교양서를 뚝심 있게 펴내는 출판사. 권오상 연암서가 대표는 "'중세의 가을'은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와 핵심 주제가 겹치는 자매 같은 책"이라며 "2010년 '호모 루덴스'를 낼 때부터 '중세의 가을' 출간을 염두에 뒀다"고 말했다. 연암서가 판 '중세의 가을'은 2012년 초판 발행 이후 8쇄를 찍었다고 한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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