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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시'로 변한 빈민가… 폭염 피해는 사회적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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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美 시카고서 발생한 폭염, 섭씨 41도 지속되며 700여명 사망

희생자는 주로 빈곤 독거노인층… 이웃공동체 함께할 때 피해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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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폭염에 킨지스트리트 다리 철판이 늘어나지 않도록 물을 뿌리고 있는 모습. /글항아리

폭염 사회

에릭 클라이넨버그 지음|홍경탁 옮김
글항아리
472쪽|2만2000원

폭염은 소리 없는 재난이다. 건물 하나 파괴하지 않으면서 숱한 목숨을 빼앗는다. 1995년 7월 중순 미국 시카고에 섭씨 41도에 이르는 폭염이 일주일간 지속되면서 700여 명이 사망했다. 체감온도는 52도까지 치솟았다. 7월 14일부터 20일 사이에만 주민 485명이 목숨을 잃었다. 안치소에 들어온 시신 수는 보관 가능 한계치 222구에서 수백 구를 초과했다. 지역 육류 포장 업체가 냉동 트럭을 가져와 시신을 보관했다.

일부 시민은 도로 옆 소화전 뚜껑을 열고 쏟아지는 물줄기로 더위를 식혔다. 시내 3000여 소화전에서 물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일부 지역은 며칠 동안 물이 나오지 않았다. 전력 사용이 급증했다. 곳곳에서 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변압기 고장으로 4만9000가구에 이틀 동안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다. 에어컨은 물론 라디오·TV를 쓸 수 없어 기상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선 탓에 경찰과 소방관들은 사다리차로 고층에 사는 나이 든 주민을 구조했다.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당시 상황을 '도시의 지옥' '죽음의 도시'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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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성동구에 있는 야외 온도계 기온이 섭씨 41도를 나타내고 있다. 폭염 피해는 자연 재난이 아니라 빈곤과 고립에서 오는 사회적 재난이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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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재난일까. 저자는 폭염 피해자 다수가 혼자 사는 빈곤 노인층이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희생자는 사회 취약 계층이 모여 사는 지역의 독거노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폭염 피해가 사회적 재난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저자는 희생자가 사망한 집을 답사하고 이웃·친구·친척들을 인터뷰하면서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사회적 부검(social autopsy)'을 실시했다. 사망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려면 희생자가 처한 사회적 조건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폭염 피해의 가장 큰 원인은 빈곤과 고립이었다. 유산 관리소 보고서에 나오는 폭염 사망자 160명 중 62명이 원룸 주거 시설 거주자였다. 여성보다 남성이 더 취약했다. 무연고 폭염 사망자 56명 중 약 80%인 44명이 남성 노인이었다. 여성은 나이 들어도 사회적 관계가 완전히 끊기는 경우가 적어 폭염 희생자가 적은 것으로 분석된다.

집에서 나와 인근 공원에서 잠을 청했다면 사망자 수는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카고 취약 계층이 사는 지역에서 밤에 현관문을 나서기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시카고는 살인 1위, 중범죄 5위, 절도 6위로 미국에서 대표적으로 위험한 도시로 꼽힌다. 주민들은 폭력 범죄가 빈번히 일어나는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차라리 극심한 더위를 견뎠다. 인종 분포로는 흑인(아프리카계 미국인) 밀집 지역에 희생자가 많았다. 폭염 사망률이 높은 15지역 중 상위 10지역의 흑인 비율은 94~99%에 달했다. 이들은 빈곤과 고립 상태에서 폭염 피해를 그대로 입었다.

반면 공동체가 살아있는 지역은 피해가 적었다. 노스론데일과 사우스론데일(리틀빌리지)은 독거노인 인구와 빈곤층 노인 비율이 거의 비슷한 지역이지만 노스론데일에서는 19명이 죽은 반면 사우스론데일에선 3명이 사망했다. 사우스론데일은 인구 85%가 라틴계로 이들은 가족과 유대 관계가 강해 위급 상황에서 긴밀하게 연락했다. 또 이웃을 연결하는 공동체 조직이 있었다. 노스론데일 지역에서 사망자가 더 많은 이유는 공동체가 이들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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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부의 안이한 대응도 피해를 키웠다. 시 당국은 폭염 피해를 막을 수 없는 자연 재난으로 여겼다. 재난 대처 책임을 회피했다. 피해 규모가 커진 이유를 전력 회사의 문제로 돌리기에 급급했다.

폭염 피해는 금세 잊힌다. 폭염은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내지 않고 지진·태풍 같은 재난처럼 엄청난 볼거리를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피해자 대부분이 가난하고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론도 이들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기상·환경학자들은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폭염이 앞으로도 육지 전체에 나타날 가능성은 90~99%라고 전망한다. 뜨거운 여름날이 일상이 된다는 뜻이다. 취약 계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죽음의 도시'는 반복될 것이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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