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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보자마자 좋은 사람이 있다… 유교수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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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애정 만세]

조선일보

만화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 등장하는 유 교수는 원칙은 있지만 편견은 없다. 소신을 지키면서 유연하게 사고한다. 예순 넘은 나이에도 손녀에게 배울 줄 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곧은 자세를 유지하지만 꼰대만큼 뻣뻣하지는 않다. 이 상쾌한 할아버지를 그려낸 작가는 당시 반신불수 상태로 한쪽 시력마저 잃었었다. 상쾌함은 결코 가벼움과 같지 않다. /만화 '천재 유교수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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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마자 마음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도 그랬다. 이십 년 전 처음 봤는데 표지에 있던 유 교수의 외양에 마음을 뺏겼다. 유 교수는 양복을 입고 눈을 감고 있는 노년의 남자였다. 또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란 제목은 너무나 내 취향이었던 것이다. '천재'와 '유교수'와 '생활', 모두 흥미로운 단어인데 이것들의 조합이라니 나로서는 읽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었다.

첫 장의 장면도 강렬했다. 한 컷짜리. 한 남자가 아직 빨간 신호등인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질주하고 있다. 그의 돌발 행동에 놀란 차 두 대가 엉켜 있고, 횡단보도에 선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오는 독백. "왜 모두들 시간이 있는데 그렇게 달리는 걸까? 또 없는데 그렇게 헛되게 낭비하는 걸까? 왜 토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또 술을 마시는 걸까? 왜 모두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농땡이를 치는 걸까?" 유 교수다. 그는 바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소설로 치면 아주 잘 쓴 첫 문장인 것이다.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화자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도 알려준다. 어떤 톤으로 이야기할지도 알려준다. 나는 소설이나 만화나 이 '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톤이란 노래로 따지면 음색. 목소리의 색깔이다. 아무리 노래가 좋고 기교가 뛰어나고 발성이 풍부하다고 할지라도 음색에 끌리지 않으면 노래를 끝까지 듣고 싶지 않아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나는 몇 년 만에 이 책을 다시 펴고는 내가 그야말로 첫눈에 반했었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이 만화의 음색이 마음에 들었다.

만화는 이렇게 진행된다. 두 번째 장에서 잠자리에서 막 깨어나는 남자가 그려진다. 그가 깬 시각은 5시 15분. 15분 더 잤음을 알고는 살짝 불쾌해하는 그가 바로 유 교수. Y대 경제학부 교수로 나이는 60을 넘겼다. 아내와 넷째 딸과 함께 살고 있으며, 오늘 넷째 딸은 아버지가 재직 중인 Y대학으로의 첫 등교를 앞두고 있다. 평범한가? 단조롭다면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다.

이 만화의 매력은 전적으로 유 교수에게서 나온다. 그는 아무리 늦어도 교통질서나 공중도덕을 위반하지 않고 걸어서 학교에 간다. 어느 정도까지 철저한가 하느냐면 사유지인 땅도 밟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니 애초에 늦게 나오지 않는다는 게 맞을 것이다. 이런저런 원칙들을 지키는 데 소요될 시간까지 헤아려 일찍 나온다. 그러고는 그의 원칙들을 준수하며 빠른 것 같지만 느리게 걷는다. 걷는다. 걷는다. 유 교수는 걷고 또 걸으며 그와는 상당히 다른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과 만난다. 그러면서 삶의 한 순간을 나눈다. 교감인 것 같기도 하고 교감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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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다 깨달았는데 이 만화는 산책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만화라고도 할 수 있다. 유 교수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강의실과 집을 제외하면 모두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거리는 우리가 도무지 만날 것 같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을 겪게도 하는 곳이 아니던가. 최근 읽었던 책의 문장이 떠올랐다. '시인이 되고 싶으면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라. 존 웨인처럼 걷는 것과 껌 씹는 걸 동시에 못 하는 거야?'라고. 유 교수는 물론 걷는 것과 껌 씹는 걸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껌을 씹는 대신 길에 떨어진 껌을 주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걸으면서 많은 것을 한다. 프로 산책자다.

유 교수는 걷고, 생각하고, 걷고, 생각한다. 그러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상대를 해준다. 꼭 사람만 상대하는 건 아니다. 불법 선거운동 포스터는 촤악 촤악 찢어 제거하고, 개똥을 발견하면 지참한 분필을 꺼내 개똥 주변으로 원을 그리고 '범인을 잡아라'고 쓰고, 게이트볼을 하자고 잡는 사람에게 잡혀 게이트볼을 한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그날의 무용담을 가족들에게 들려준다. 남자가 볼에 입을 맞춘다든가 하는 부끄러운 일들은 빼고. 아홉 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잔다. 그러고는 여덟 시간의 숙면을 취한 뒤 다섯 시에 깨어난다. 유 교수의 쾌면은 준수되어야 하므로 누구도 그를 방해할 수 없다. 이게 바로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다.

내가 유 교수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장면이 있다. 손녀 나츠코를 포대기에 업고 나츠코의 옷을 사러 간 유 교수는 해괴한 영어로 된 티셔츠를 보고 질색한다. 'Three Child'는 복수인데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며 소리 지르고, 'Love Child'라고 쓴 티셔츠를 보고는 "이건 '사생아'라는 의미다"라고 외치며 표정이 굳는다. 내가 유 교수의 입장이라면 나도 그럴 것 같다. 물론 소리를 지르지는 않고, 티셔츠를 조용히 내려놓고 매장을 나올 것이다. 하지만 유 교수는 공공선을 위한 일을 한다. 점원에게 이런 옷을 아이들에게 입힐 거냐고 항의하고, 말이 안 통하자 문제의 티셔츠들을 구석에 숨겨놓고 매장을 나온다.

이 만화의 인물들은 유 교수를 너무나 좋아한다. 넷째 딸과 아내, 손녀 나츠코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에게 꾸지람을 들은 열등생이나 폭주족 같은 이들도 유 교수에게 빠져드는 것은 기이할 정도다. 올곧은 자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머리를 세우고 진한 화장을 하고 다니는 남학생에게는 자기가 정한 스타일이라면 꼭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 하고, 과거 히피 차림으로 다니던 제자가 변모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땐 젊었다며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난 그 시절의 자넬 부정하네"라고 말한다.

또 손녀인 유아 나츠코와 간 스키장에서의 일이 백미다. 도대체 규칙이 없다며 '허영에 사로잡혀 멋대로 미끄러지는 게 스포츠'냐고 불쾌해하던 유 교수가 나츠코가 멋지게 활강하는 걸 보며 이렇게 깨닫는다. "아이들은 저렇게 해서 미끄러지는가 보다. 스포츠란 자신과 외계의 관계, 그리고 소질인 모양이다." 원칙은 있지만 편견은 없다. 육십이 넘어서도 배우고 깨닫는다. 유아인 손녀에게도. 꼰대와는 거리가 먼 상쾌한 육십대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의 작가 야마시타 가즈미는 만화가로 데뷔한 지 1년 후 오른쪽 시력을 잃고 오른쪽이 반신마비가 된다. 그러고는 결심한다. "만화가로 살아가자. 모든 것을 걸어보자." 나는 그런 그가 이런 산뜻하기 이를 데 없는 만화를 그렸다는 것에서 그의 터프한 정신을 본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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