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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뜨거운 여름을 견디게 해준 은빛 엽서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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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의 근대탐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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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철도주식회사 마크가 찍혀 있는 그림엽서 겉봉. 필기체로 쓰인 마사미치 세자키(Masamichi Sezaki)는 소장자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 김시덕 제공

지난 1일 서울의 한낮 최고기온이 39.6도를 기록했다. 필자가 스무 살 되던 1994년 7월 24일의 최고기온이 38.4도였으니, 24년 만에 최고기온 기록이 경신된 것이다. 비공식적으로는 서울 시내 곳곳에서 40도를 넘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1994년의 한 해 전인 1993년 여름에는 이상 저온 현상이 발생했다. 덕분에 고3 수험 생활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기에, 그다음 해의 이상 고온은 더욱더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24년간 유지되던 최고기온 기록이 경신된 것이지만, 이런 유의 기록 경신은 하나도 반갑지 않다.

올해의 이상 고온은 일본·중국·타이완 등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보고되고 있다. 최근 몇 년의 이상 고온은 지구 전체의 기상이변 때문이지만 특히 일본 열도는 예전부터 뜨거운 여름을 맞이해왔다. 에어컨이 발명된 것은 1902년이지만, 일반에 보급된 것은 수십 년 뒤의 일이다. 그간 일본의 서민들은 선풍기와 부채로 더위를 견뎠다. 이들이 여름을 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 것이 북쪽 나라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었다. 일본의 전근대인 에도 시대(江戶時代·17세기 초~1868년)에 탄생한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는 여름이면 설국 풍경을 담아 싼값에 판매되었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나마 여름 더위를 잊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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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제작·판매한 그림엽서. 말이 끄는 썰매를 탄 러시아인 남녀가 눈보라를 뚫고 은빛 벌판을 달리는 풍경이 잠시나마 여름 더위를 잊게 해준다. / 김시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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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되자 우키요에보다도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엽서라는 신상품이 등장했다. 오늘 독자분들께 소개해 드릴 것은, 20세기 전기 만주에서 영업하던 남만주철도 주식회사(South Manchuria Railway Company), 줄여서 만철(滿鐵)이 제작한 그림엽서다. 만철의 마크와 운영 노선이 찍혀 있는 겉봉 속에 그림엽서가 다섯 장 들어 있다. 겉봉에는 마사미치 세자키(Masamichi Sezaki)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으니, 세자키 마사미치씨의 소장품이었으리라.

각각 북부 중국의 풍경과 풍습을 보여주는 그림엽서 다섯 장 가운데 오늘 소개할 엽서는, 말이 끄는 눈썰매를 타고 은빛 벌판을 달리는 러시아인 남녀의 모습을 담은 엽서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눈보라(吹雪·후부키)라고 적혀 있어서, 이것이 겨울 풍경임을 알려준다. 거의 80년이 지난 지금도 엽서 표면에서 은빛이 번쩍이고 있어서, 신문의 사진이 이 은빛을 독자분들께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만주에서 이 엽서를 구입한 세자키씨는 본국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뜨거운 여름날이면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의 은세계(銀世界)를 바라보며 잠시나마 여름 더위를 잊으려 애썼을 것 같다.

80년 전과 달리, 21세기도 18년째가 지나가는 이 여름에는 에어컨이 일본과 한국 구석구석에 보급되어 있다. 그런데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전기를 아끼자면서 공공장소·대중교통의 에어컨을 끄거나 설정 온도를 올리는 모습을 최근 몇 년간 한국 곳곳에서 목격한다. 자가용과 자기 집에서 맘껏 에어컨을 틀 수 없는 서민들이, 공공장소와 대중교통에서까지 더위에 시달리고 있다. 얇은 옷을 입고 겨울 그림을 보면서 정신력으로 더위를 이기려 낑낑대는 게 아니라, 에어컨을 맘껏 틀어서 쾌적하게 여름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경제를 발전시키고 과학기술을 혁신시킨 게 아니었던가?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필자는 오늘도 뜨거운 공기가 가득한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린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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