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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액션·총격전 없는 첩보극, 스파이는 연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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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의 윤종빈 감독 인터뷰

1990년대 안기부 ‘흑금성’ 모티브

“적을 인간으로, 동지로 보는 얘기”

97년 대선과 북풍사건 등도 다뤄

“확인 불가능한 팩트 너무 많았다”

중앙일보

영화 ‘공작’의 북한 대외경제위 처장 리명운(이성민 분)과 대북사업가로 위장하고 그에게 접근한 안기부 공작원 박석영(황정민 분).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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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영화인데, 총격전은커녕 격투 장면도 없다. 8일 개봉한 ‘공작’은 신분을 감추고 적에게 접근한 첩보원, 그를 의심하면서도 손을 잡으려는 상대방, 이런 상황과 거듭된 만남에서 긴장을 이끌어낸다.

윤종빈(39) 감독은 1990년대 암호명 ‘흑금성’으로 활동한 안기부 대북공작원의 실화를 모티브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개봉 전날 인터뷰에서 그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흥미로웠다”고 했다. “창작자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얘기니까. 또 한국 현대사나 정치와 관련돼 있고. 첩보영화의 본질적인 거를 비틀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Q : 뭐가 그렇게 흥미로웠나.



A : “한국에서 북한에 이런 스파이를 침투시켰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신분 세탁을 하고, 사업가로 위장하고, 북한에 들어가 1호(김정일)를 만나고, 너무 드라마틱 하더라.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딜레마에 빠지고,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고 하는 게 너무 영화적이었다.”




Q : 본질을 비튼다는 의미는.



A : “첩보물 자체가 냉전시대 산물이잖나, 냉전적 사고는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건데 이 스파이는 군인, 제일 중요한 건 피아식별이다. 그런 사람이 적을 하나의 인간으로, 동지로 보게 되고 이해하는 스토리다.”


주인공 박석영(황정민 분)은 육군 출신으로 안기부 공작원 ‘흑금성’이 되어 비밀 임무를 맡는다. 90년대 당시 북한 핵개발 실태를 파악하는 것. 중국에서 북한의 외화벌이를 담당하는 리명운(이성민 분)에게 접근하고, 북한에 직접 들어가기 위해 한국기업 광고를 북한에서 촬영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리명운 역시 주변의 견제에도 사업을 성사시키려 애쓴다.



Q : 상대에 따라 박성영이 고향 대구 사투리와 서울말, 서로 다른 말투를 쓰는데.



A : “여러 이유가 있다. 장르적으론 액션 없는 첩보물이라 관객에게 다른 식의 재미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생각한 첩보원은 액션하는 무도가, ‘본’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처럼 일당백의 싸움을 잘하는 무도가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 상대를 속여야하는 연기자였다. 내부적으로 얘기한 컨셉이 ‘연기하는 공작원’이다. 그걸 영화로 표현하고 관객들이 구별할 장치가 있었으면 싶었다. 안경도 실제 흑금성이 원래 눈이 좋은데 공작원 할 때는 안경을 쓴 것에 착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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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군도’에 이어 ‘공작’을 내놓은 윤종빈 감독. 제작보고회 때 모습이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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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영화 시작하고) 한 시간 반까지 박성영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하게 파악이 안됐으면 싶었다”고 말을 이어갔다. 박성영의 가족 얘기를 전혀 등장시키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관객에게 알려주지 않고,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에 ‘아 이런 사람이구나’ 드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Q : 이성민의 연기가 좋더라. 리명운 같은 캐릭터를 연기한 적은 없는데.



A : “두 사람이 서로 의심하고 견제하는 관계, 그런데 서로의 신념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얘기가 돼야했다. 표현 안 해도 인간적인 따뜻함이 느껴지는 사람, 차가운 척 해도 따뜻함이 묻어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말로 ‘츤데레’라고 하나. 예를 들어 기자가 너무 질문을 직설적으로 하면 내 입장에선 싫겠지만 결과물이나 일을 대하는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보면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지 않나. 두 사람 관계도 그런 것 같다.”




Q : 배우들이 액션 없이 대사로 긴장감을 만드는 연기가 퍽 버거웠다고 하던데.



A : “저도 안 해봐서 몰랐다. 대본으로는 써놨지만. 5분 동안 대화하는 것만으로 정말 안 지루할까. 김정일 만나는 장면은 7,8분을 대화로만 끌고 가야하는데 말이 좋아 긴장감이지 이게 과연 될 지 나도 안 해봤으니 모르는 거였다. 배우들도 기댈 데가 없었다.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한다. 김정일 앞에서 움직이면서 얘기할 수 없잖나. 시선도 못 마주치니까.”


순제작비 165억원을 들인 ‘공작’은 대만의 세트와 거리에서 중국 배경 장면 등을 촬영했다. 평양 시가지 전경이나 이를 공중에 내려다 본 부감 샷 등은 외국 촬영팀이 찍은 영상을 구입해 합성한 결과다. 국내에서 북한 장마당 장면을 촬영할 때는 현장에 써놓은 북한선전문구를 보고 주민들이 ‘북한찬양단체가 나타났다’며 신고를 해서 촬영이 중단된 날도 있었다고 한다. 눈길을 끄는 김정일 면담 장면은 국내에 세트를 만들어 촬영했다.



Q : 면담 장면에 개가 나오는 게 인상적이다.



A : “직접 만났던 사람들 증언 중에 제일 구체적이고 재미있었던 게 탈북시인 장진성씨가 쓴 ‘친애하는 지도자에게’ 란 회고록이다. 각 잡고 서있는데 강아지가 와서 발을 핥았다고 하더라. 애완견을 좋아하고 많이 기른다고 한다. 아이러니하면서도 뭔가 설명이 되는 것 같고. 그 공간에서 제일 자유로운 건 애완견이잖나.”




Q : 김정일 역할을 맡은 배우 기주봉에게 따로 주문한 게 있나.



A : “제게 계속 육성을 들려달라고 했는데, 김정일 말투를 흉내내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이 김정일 얼굴은 굉장히 잘 안다, 근데 김정일 육성을 아는 사람은 없다. 따라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굉장히 빠르고 못 알아들을 말투다. 흉내내는 게 아니라 김정일처럼 보이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김정일 분장은 할리우드 분장팀 솜씨다. 그 앞에선 위기를 넘기지만 뜻밖의 위기가 박석영에게 닥친다. 흑금성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건 97년 대선과 이른바 북풍사건을 통해서. 영화에도 중요한 고비로 등장한다. 논란의 여지도 있다.

흑금성의 회고록에 대해 감독은 “제가 크로스 체크하기 불가능한 팩트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김정일 만났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주장’이다. 그걸 확인할 데가 없다. 북한에 물어볼 수도 없고.” 대신 그는 관련 사안을 오래 추적한 김당 기자 같은 언론인의 크로스 체크를 신뢰한다며 “저도 배운 사람이고, 제가 봤을 때 (회고록이) 굉장히 디테일해 소설 같진 않았다”고 덧붙였다.



Q : 마지막 장면은 2005년 시점인데.



A : “엔딩을 정해놓고 시나리오를 썼다. 처음에 제가 떠올렸던 게 이효리씨가 나온 광고, 이 광고를 만들었던 배후에 있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영화를 보통 5, 6개월 편집하는데 이번에는 10개월을 했다”고 했다. 지난 5월 칸영화제에 먼저 선보인 뒤 다시 편집을 손봐 전체 길이가 4분 가량 줄었다. 이해도가 떨어지는 대사 등을 줄이고, 잘 안들린다는 내레이션을 다시 녹음했다고 한다. “(편집하며)영화를 100번씩 보게된다. 내용도 알고, 대사와 커트까지 다 외우는데 얼마나 지루하겠나. 신기한 게 이 영화는 또 보게 된다. 이야기와 연기의 힘이구나 싶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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