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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참사 그 후 (1) 노르웨이 브레이비크 테러]단죄보다 관용···“그럼에도 좀 더 분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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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몫, 진정한 추모는 변화

학살·테러·쓰나미…무고한 죽음, 세계는 갈등 딛고 무얼 배웠나

한국 사회도 기억과 성찰 필요



참사 그 후, 진정한 추모는 변화다

지난 5월 칠레 산티아고의 한 호텔 앞, 100여명의 시위대가 외쳤다. “콜바란, 살인자! 범죄자!” 호텔에선 1970~1980년대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 시절 비밀경찰 조직(국가정보센터)에서 일한 알바로 콜바란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3000명 넘는 시민을 학살한 독재정부에서 고문·살인 범죄를 저지른 콜바란은 감옥에서도 특혜를 받아 편히 지내며 집필했다. 시위대는 다시 외쳤다. “수많은 악이 처벌받지 않은 채 어떤 민주주의도 작동할 수 없다.” 칠레의 시민 학살은 과거사가 아니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필요한 오늘의 문제였다.

2004년 12월26일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선 모두가 유가족이 됐다. 밀려들어오는 검은 파도를 피해 간신히, 운 좋게 살아남은 자는 12만명의 죽음을 마주했다. 반다아체는 거대한 추모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가족과 이웃을 떠나보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 삶의 터전을 다시 세운 이들은 매일 쓰나미를 되새긴다. 인간의 힘으론 자연을 당해낼 수 없지만, 기억하고 극복하는 일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테러, 자연재해, 독재와 정치적 탄압, 산업재해…. 수많은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는 사건을 ‘참사’라 부른다. 이토록 ‘큰 죽음’에서 사회는 무엇을 배우는가? 지난 5~7월 참사를 겪은 노르웨이·독일·인도네시아·스리랑카·인도·칠레·아르헨티나를 찾아 죽음이 갈등을 낳고 배움이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2011년 7월22일 브레이비크 테러에서 77명의 생명을 잃은 노르웨이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극우 테러리스트가 정치 캠프를 찾은 어린 소년을 권총으로 확인사살까지 한 잔혹한 참사였지만 노르웨이는 관용으로 대답했다. 테러가 구성원의 분노와 공격성을 증폭시키는 통상의 경우와 사뭇 달랐다. 참사 추모의 모범적 선례로 꼽히는 노르웨이조차 지금 ‘더 많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고개를 숙인다.

정부·사회와 희생자·유가족이 손잡아야 할 시기를 놓치면 배움은 멀어진다. 1984년 12월 다국적회사 유니언카바이드의 인도 보팔 공장에서 가스가 누출돼 1만6000여명이 숨졌지만 책임자 재판 선고는 26년 지난 2010년에야 이뤄졌다. 인도 대법원은 이미 ‘유니언카바이드가 인도 정부에 배상금 4억7000만달러를 지불하고 모든 민형사상 책임을 면한다’고 승인한 뒤였다.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2년을 받은 워런 앤더슨 회장은 법원의 출석 요구에 불응한 채 미국 플로리다 해변의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떴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눈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한국 사회도 무수한 참사와 맞닥뜨렸다. 그때마다 배움은커녕 터져 나오는 분열과 갈등의 소리를 수습하기 바빴다. 죄 없이 죽은 이들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선, 달라져야 한다. 다시는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게 사회도 바꿔야 한다. 진정한 추모는 변화다.


■ 시리즈 순서

① 더 많은 민주주의: 브레이비크 테러 이후 노르웨이

② 같은 참사, 다른 대응: 쓰나미 덮친 인도 네시아와 스리랑카

③ 기억하고 싸운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군부독재 역사 청산

④ 정부가 못하면 민간이: 인도 보팔 참사 당사자들의 생존 투쟁

⑤ 시민은 힘이 세다: 독일 사회의 홀로코 스트 추모 방식

⑥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취재기자들이 본 세계와 한국


(1)더 많은 민주주의 : 브레이비크 테러 이후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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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퇴위아는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북서쪽으로 약 60㎞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노르웨이의 진보적 청년들 사이에서 ‘지상낙원’이라고 불리던 곳이었지만, 2011년 7월22일 오후 우퇴위아는 참담한 지옥이었다. 이날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라는 이름의 32세 백인 남성이 오후 5시10분쯤부터 6시20분쯤까지 총기를 난사해 69명을 학살했다. 사망자 대부분이 노르웨이 노동당 청년동맹 여름캠프에 참가한 10대 청소년들이었다. 가장 어린 사망자는 14세였다. 2014년 4월16일이 한국인들에게 그러하듯, 2011년 이후 노르웨이인들에게 ‘7월22일’은 해마다 반복되는 달력 속 날짜가 아니라 노르웨이 현대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을 가리키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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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참사

지난 6월21일 아침, 우퇴위아로 가기 위해 오슬로 버스터미널에서 회네포스행 버스에 올랐다. 오슬로에서 우퇴위아로 가는 길은 구글지도 검색에도 나오지 않았다. 우퇴위아 청년동맹 사무국 직원 안 브리트 피렐로의 조언에 따라 1시간쯤 후 순드볼렌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 간이정류장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섬이 있는 튀리피오르덴 호수를 끼고 10여분을 움직이자 간이선착장이 나타났다. 소형 연락선을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선착장에서 섬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우퇴위아는 면적이 0.106㎢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면 한 바퀴를 도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듯했다. 우퇴위아는 조용했다. 10시쯤 비가 그친 이후부터 무성한 숲을 가득 채우는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소나무숲 너머 튀리피오르덴 호수의 푸른 물, 노르웨이 특유의 피오르 지형. 피렐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지금도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선착장에서 언덕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걸으면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막다른 지점이 나온다. 이곳에는 원통 모양의 커다란 금속 조형물이 나무 사이에 걸려 있다. 원통의 측면에는 2011년 7월22일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 있다. 2015년 청년동맹이 설치한 추모 조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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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퇴위아가 ‘지옥’이 되기 2시간 전쯤, 총리 공관이 자리 잡은 오슬로 정부 청사 건물 입구에 주차돼 있던 폭스바겐 차량이 폭발했다. 나중에 확인된 폐쇄회로(CC)TV 영상에는 경찰 복장의 백인 남성이 차를 주차하고 그 자리를 떠나는 장면이 포착돼 있었다.

이 폭발로 8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차량 폭발은 미끼에 불과했다. 브레이비크는 정부와 경찰이 청사 폭발을 수습하는 동안 피아트 차량을 타고 노동당 청년동맹의 여름캠프가 열리고 있던 우퇴위아로 향했다. 노르웨이 경찰은 폭발 후 오슬로 밖으로 빠져나가는 차량들을 봉쇄하지 않았다. 브레이비크는 아무런 제지 없이 오후 5시쯤 섬에 도착했다. 이후 약 1시간20분 동안 그는 ‘궁니르’(북유럽 신화의 신 오딘이 사용하는 무기)라고 이름 붙인 소총과 ‘묠니르’(북유럽 신화의 신 토르가 사용하는 무기)라 이름 붙인 권총을 사용해 학살을 시작했다.

인근 지역 경찰은 학살이 시작된 지 30여분 만에 섬 맞은편에 도착했다. 그러나 보트가 고장 나 섬에 곧바로 상륙할 수 없었다. 중무장한 경찰 진압부대는 학살 시작 1시간이 지나서야 섬에 도착했다.

진압부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브레이비크는 청소년들을 뒤쫓아 섬 전체를 뒤졌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친구들의 시신 사이에서 죽은 척했다. 그래도 총격을 피할 수 없었다. 브레이비크는 이미 넘어진 사람들의 머리를 겨냥해 확인사살을 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가장 심각한 극우 테러는 2001년 네오나치 그룹 소속 청년 5명이 반인종주의 활동가로 유명했던 15세 흑인 소년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노르웨이의 첫 인종혐오 살인이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던졌다. 외국인 테러리스트가 노르웨이 국내에서 살인을 한 적도 없었다. ‘7월22일’은 범인이 노르웨이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백인 남성이라는 점과 사망자 규모가 77명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르웨이 최악의 참사로 꼽힌다.

우퇴위아에는 청년동맹이 사용하는 건물 17개 동이 있다. 청년동맹은 2011년 이후 4년간 섬을 닫아두었다가 전면적인 건물 리모델링을 거쳐 2015년 ‘우퇴위아 재건’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현재 우퇴위아에서 참사 당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보호하는 집’이라는 명칭이 붙은 건물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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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하는 집’은 참사 이전까지는 카페로 사용됐던 건물에 유리와 콘크리트를 이용해 만든 덮개를 씌우고 그 측면을 따라 69개의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다. 69는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의 숫자를 뜻한다. 노르웨이의 10대들이 웃고 떠들고 토론했을 옛 카페 건물의 벽에는 당시 총탄이 꿰뚫고 지나간 구멍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일부 희생자들의 사진이 꽃과 편지와 함께 놓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청년동맹은 ‘보호하는 집’을 추모와 애도의 공간이자 노르웨이 시민단체 두 곳과 연계해 벌이는 민주주의 교육 프로그램의 학습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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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비크는 경찰에 붙잡히자 “사적인 감정은 없다. 내 행동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슬림이 유럽을 이슬람화하기 위해 거대한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유라비아’ 음모론의 신봉자였다. 브레이비크는 노르웨이가 이슬람화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주범을 당시 집권당이자 이민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노동당이라고 봤다.

우퇴위아는 작은 섬이지만 노르웨이 현대사에서의 위치는 결코 작지 않다. 우퇴위아는 노르웨이 진보의 요람과 같은 곳이다. 우퇴이아는 본래 노르웨이 노동조합이 소유한 땅이었다. 노조는 우퇴위아를 노동계급 자녀들의 휴일 캠프 장소로 사용했다. 노조가 1950년 섬을 청년동맹에 무상으로 양도하면서 우퇴위아는 노동당의 미래를 책임질 예비 정치인들을 위한 교육과 친교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청년동맹 소속 노르웨이 10대들은 우퇴위아에서 열리는 여름캠프를 해마다 손꼽아 기다렸다. 청년동맹 리더 출신인 노르웨이 전 총리 옌스 스톨텐베르의 말처럼, 우퇴위아는 “지난 60년 동안 노르웨이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장소들 중 하나”다.

1887년 창당한 노동당은 장기간 집권하면서 노르웨이를 사민주의 복지국가로 만든 정치세력이다. 브레이비크가 정부 청사에 폭탄을 터뜨리고 청년동맹 여름캠프에 참가한 10대들을 학살한 것은 노르웨이 민주주의와 노르웨이 진보에 대한 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여긴 단순하면서도 서늘해요. 매우 강력한 정서적 충격을 주는 공간입니다.”

지난달 20일 오후 오슬로 시내의 ‘7월22일 센터’에서 만난 시민 얀 하그포르스(43)의 눈시울은 젖어 있었다. 그는 트론하임의 한 중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친다. 한 시간쯤 전 ‘7월22일 센터’에 들어온 그는 시간을 들여 센터 내 전시를 유심히 살핀 후 7월22일 참사 생존자들의 증언이 담긴 동영상을 보고 나오는 길에 기자와 만났다. 그는 당시 트론하임에 있었지만 아직도 그날의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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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충격이었어요. 폭발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폭탄 테러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니까요. 충격적이었던 건 섬으로 가서 아이들을 쐈다는 거예요. 스테로이드까지 복용해가며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서 침착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죽였어요.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의 머릿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7월22일 센터’는 추모와 증언, 교육을 위한 공간이다. 센터는 ‘ㄷ’자 형태의 전시 공간 4개로 나뉜다. 센터 출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가장 먼저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린 방을 만날 수 있다. 하그포르스는 “죽은 아이들이 지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비슷한 또래다. 사진 속 아이들의 시선과 눈을 맞추는 게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7월22일 센터’의 핵심은 정부 청사 폭발이 일어난 2011년 7월22일 오후 3시20분 무렵부터 브레이비크가 경찰 진압부대에 체포되기까지의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펼쳐놓은 타임라인이다. 타임라인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밖을 향해 난 작은 창이 하나 있다. 창을 통해 보이는 것은 정부 청사 입구다. 참사 당일 브레이비크가 폭탄을 실은 폭스바겐 차량을 주차해뒀던 바로 그 장소다.

전시 공간 한복판에 놓여 있는 휘어지고 녹슨 철제 구조물이 눈길을 끌었다. 사건 당일 폭발하고 남은 폭스바겐 차량의 잔해였다. 그 옆에는 우퇴위아의 10대들이 마지막까지 부모나 친구들과 연락하는 데 사용했던 휴대폰과 카메라가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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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2일 센터’에는 브레이비크가 사용했던 가짜 경찰 신분증도 전시돼 있다. 폭스바겐 차량의 잔해나 가짜 경찰 신분증은 개관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다. 잊고 싶은 테러의 흔적을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센터의 이름을 ‘브레이비크 전시관’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전시물들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7월22일 센터’ 건물 자체가 당시 참사의 증거다. 센터 내부는 폭발로 부서진 정부 청사 건물의 잔해들을 사용했다. 주 전시 공간의 앙상한 철근이나 전시장 곳곳의 부서진 콘크리트는 관람객들에게 건물의 잔해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타임라인이 끝나는 지점에는 참사 당일 촬영된 우퇴위아의 전경이 담긴 초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그다음은 생존자들의 증언이 담긴 영상을 상영하는 공간과 ‘7월22일’ 관련 서적이 꽂힌 서가, 2012년 노르웨이를 떠들썩하게 만든 브레이비크 재판 사진, 참사 직후 노르웨이 전국에서 벌어진 추모 행렬 사진 등이다.

‘7월22일 센터’는 교육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4세 미만 청소년, 14~19세 청소년, 이민자 가정 청소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센터 교육 매니저인 안 탈스네스는 “‘7월22일’만이 아니라 모가디슈나 소말리아 등 테러가 벌어지는 다른 지역의 정보도 제공해 넓은 맥락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하려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정부 차원에서 일선 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재를 개발하고 있다. 탈스네스는 “그동안에는 학교에 ‘7월22일’이 정식 교육 내용에 포함돼 있지 않아 이를 가르치느냐 마느냐는 교사들의 재량에 맡겨져 있었다”면서 “그러나 사건 발생 7년이 지나면서 참사를 기억하는 학생들이 줄어들어 교재 개발의 필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 우리에겐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참사 당시 노르웨이 총리였던 옌스 스톨텐베르그는 참사 이틀 후 오슬로 성당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우리는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개방, 그리고 더 많은 인도주의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증오에 사랑으로 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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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민주주의’를 강조한 총리의 발언은 듣기에만 좋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다. 노르웨이의 대응은 미국과 확연히 달랐다. 9·11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의 보복에 나섰다. 테러 이후 ‘안전’을 명분으로 통과된 애국자법은 정보기관의 영장 없는 도청을 합법화하고 테러리스트 의심 인물에 대한 무기한 구금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했다.

반면 2011년 참사 직후 노르웨이를 지배한 것은 보복이 아니라 애도였다. 오슬로는 물론 노르웨이 전역이 애도의 뜻을 담은 붉은 장미로 뒤덮였다. 브레이비크가 노르웨이 정치 지형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우파 정당 진보당의 당원으로 7년간 활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진보당에 책임을 돌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브레이비크가 ‘2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노르웨이에서는 ‘21년형’이 최고형이다. 노르웨이 형벌제도가 ‘보복’이 아니라 사회로의 복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범죄자에 대해 예외적으로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없었을까. 지난달 18일 오슬로 지방법원 앞에서 만난 노르웨이 저널리스트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는 “그런 요구는 없었다”면서 “테러범 한 명 때문에 민주적 제도의 안정성을 흔들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말했다.

2016년 4월 노르웨이 법원은 브레이비크가 교도소 내에서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그의 손을 들어줬다. “비인간적이고 모멸적 대우를 금지하는 것은 민주 사회의 기본 가치”라며 “이런 가치는 테러범이나 살인자에게도 적용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해 3월 노르웨이 최고법원 재판에서 결국 브레이비크가 패소하긴 했지만 원고가 테러범이라는 이유로 재판 받을 권리가 부인되거나 훼손되지는 않았다.

브레이비크는 2015년에 오슬로 대학 정치학 학부 과정에 입학하기도 했다. 노르웨이는 수감자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있다. 당시 오슬로 대학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에게 입학을 허가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고 브레이비크 한 사람 때문에 그 원칙을 깰 수는 없다”고 말했다.

‘7월22일’을 다룬 최고의 책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우리들 중 하나(One of Us)>를 쓴 사이에르스타는 “브레이비크는 괴물이 아니라 노르웨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사회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민주주의가 테러를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선의 대안은 보다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르웨이에서는 2011년 7월22일 참사 이후 정치에 대한 청년층의 관심이 높아졌다. 사건 직후 치러진 그해 지방선거에서 생애 첫 투표자(18~21세) 투표율이 46%로 나타났는데, 이는 그 이전 선거에 비해 11%포인트 높은 수치다. 사건 직후 각 정당 청년조직 가입자들의 수도 증가했다. 노르웨이 정당 청년조직 가입자는 2010년 1만1060명에서 2011년 1만7066명으로 증가했다. 흥미롭게도 테러의 직접적 피해자였던 청년동맹만이 아니라 다른 보수정당들의 청년조직 가입자 수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르웨이 사회과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요하네스 베르그는 ‘7월22일’의 영향을 받은 세대를 ‘우퇴위아 세대’라고 부른다. 지난 6월20일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만난 그는 “사건의 피해자였던 청년동맹만이 아니라 다른 보수정당들의 청년조직 가입자 수도 늘어났다는 건 ‘7월22일’이 특정 정당에 대한 공격을 넘어 노르웨이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청소년들이 공격을 받아 죽었어요. 그래서 정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정치에 활발히 참여하는 청소년들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청년동맹 지도부에서 활동하는 올해 스물넷인 에이리크 슈뢰더는 열다섯 살에 청년동맹에 가입했다. 베르그가 말한 우퇴위아 세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청년동맹 오슬로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2011년에 노르웨이 사람들은 범인을 증오하는 대신 모두를 껴안고, 서로를 위로하자는 분위기였다”면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인간이 브레이비크처럼 급진화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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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많이 분노해야 했을까

2015년 프랑스 잡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무슬림 테러리스트의 공격 이후 프랑스 내에서 무슬림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영국 정치평론가 오언 존스는 일간 가디언에 쓴 칼럼에서 ‘프랑스인들이 2011년 테러 이후 노르웨이인들이 보여준 관용의 정신을 배우기를 바란다’고 썼다. 노르웨이인들이 보여준 일치된 애도의 물결과 포용적 태도, 민주적 원칙에 대한 강조 등은 재난에 대한 이성적 대처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견과 비판도 있다.

지난달 18일 오슬로 대학 근처 카페에서 만난 토마스 휠란 에릭슨 오슬로 대학 교수(사회인류학)는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강조했지만 ‘7월22일’ 이후 노르웨이가 더 개방적인 사회가 됐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총선에서 진보당이 포함된 보수연정이 집권한 이후 이민자와 소수자에 대한 정책이 후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동시에 그는 ‘7월22일’에 대해 노르웨이가 추모와 관용만을 강조하면서 정작 노르웨이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상실했다고 본다. 그는 “참사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이뤄지지도 않았는데 ‘7월22일’이 이미 지나간 역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입니다. 위기 앞에 잘 뭉친다는 건 장점이지만 외부인에 대해 편견을 갖기 쉽다는 점에서는 위험하지요. 참사 이후 노르웨이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대신 장미꽃을 들고 추모하는 것으로 끝내버렸어요.”

노르웨이 정가에는 ‘7월22일’을 빌미로 다른 정당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묵계가 존재한다. 노동당은 참사 당일 대응 미숙의 책임이 있지만 직접적인 피해자였기 때문에 다른 정당들이 직접적인 비난을 피하는 분위기다. 노동당에서도 브레이비크의 과거 당적을 이유로 진보당을 공격하는 것은 금기다. 매우 이성적인 태도로 보이는 동시에, 불편한 주제에 대한 논쟁을 피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슈뢰더는 “노동당은 ‘7월22일’을 감성적으로 이용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7월22일’에 대해 언급하는 걸 꺼린다”고 말했다.

‘7월22일’ 사건이 노르웨이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오슬로 평화연구소 연구원 오스힐 콜로스의 2015년 논문에 따르면, 참사 이후 노르웨이 사회의 논쟁은 ‘7월22일’을 탈정치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브레이비크라는 자생적 극우 테러리스트를 낳은 노르웨이 사회의 문제를 철저하게 따져보기보다는 모든 책임을 브레이비크라는 개인에게 돌려버렸다는 것이다.

유족들과 생존자들을 위한 희생자 지원 그룹 대표 리스베트 뢰윈란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는 2011년에 당시 18세였던 딸을 잃었다. 6월18일 직장인 건설회사 로비에서 만난 그는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참사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여주면서 “2011년에는 관용을 강조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더 많이 분노해야 했다”고 말했다. “노동당 사람들도 그렇고 유족이나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지금 ‘7월22일’에 대한 공적 토론을 먼저 제기할 수 없는 입장이 됐어요. 우리 중 누군가가 ‘7월22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 두려운 거죠. 차라리 더 많이 화를 냈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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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윈란은 “그날 있지 말아야 할 장소에 있었던 사람은 테러범이지 내 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날 딸을 우퇴위아에 보낸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오히려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7월22일’이 공적 논의의 장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점을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노르웨이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높은 사회에서조차 그러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망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참사 후 7년이 지난 노르웨이는 추모의 모범을 제시하는 대신 대답하기 힘든 복잡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 특별취재팀

정원식·김서영(모바일팀), 김형규(토요판팀), 허진무(사회부) 기자

■ 취재 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김서영 기자·오슬로(노르웨이) | 글·사진 정원식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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