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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선공개···재계는 부담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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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안이 공개된 17일 재계의 분위기는 온종일 흉흉했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가가 주주권을 행사할 때 기준이 되는 자율행동규범이다.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해 기업 대주주의 전횡을 막고, 계열사에 대한 편법지원 등 불투명한 경영을 견제하는 것(국회 입법처 정의)’을 기본 목표로 한다. 재계가 이를 반길 리 없다.

139쪽에 달하는 도입방안 문서를 들여다보던 4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모순 아닙니까? 기업이 돈을 많이 벌어야 국민연금도 배당수익이 나는데, 돈도 많이 벌면서 동시에 ‘착한 기업’이 되라니…”라며 불만을 쏟아냈다. 재벌이 경영하는 대기업에서 총수를 제외한 외부의 ‘훈수’는 곧 경영간섭으로 받아들이는 게 여전한 재계의 분위기다. 보수언론 등은 연일 ‘정부의 기업 통제’ 등을 운운하며 재계를 거들고 있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이후에도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놓고 숱한 논란이 예고되는 대목이다.

국민연금 스스로도 갈 길이 멀다. 주주권 행사에 대한 정부 개입이나 형평성 논란이 없으려면 그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도입안에서 거론된 자체 ESG 평가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신설 및 의결권 심의 등의 문제는 간단히 내부 조직 몇 개를 만들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정부가 사외이사 추천이나 의결권 위임장 대결 등 기업을 직접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주주권 행사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일고 있는 ‘반쪽짜리’라는 비판도 넘어서야 한다.

‘마사지’된 도입안, 재계 과민반응 말아야

정부가 공개한 도입안은 2015년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가입 추진을 시작한 이래 연구용역 결과와 비공개 전문가 공청회, 정부 내부 검토 등을 다각도로 거친 결과물이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스튜어드십코드 관련 연구용역 결과는 도입안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연구용역 결과를 검토했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재계의 반발과 현실성 등을 고려해 적당히 ‘마사지’된 도입안을 내놓았다”며 “단지 보건복지부뿐만 아니라 기획재정부와 청와대의 의중까지 모두 반영된 결과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가입 이슈에서 쟁점은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어디까지 행사할지의 문제였다. 특히 ‘주주 제안을 통한 이사·감사후보 추천권’이 포함될지가 관건이었다. 기업들이 ‘경영 간섭’이라며 가장 반발해온 권한이다. 정부의 도입안에는 추천권을 포함하지 않은 ‘1안’과 포함된 ‘2안’이 모두 담겼는데, 정부 실무진이 추천하는 안은 1안이다. 실무진들은 1안을 추천하며 “이사 추천권 등은 향후 제반 여건이 형성되면 추진하는 게 낫다”는 의견을 달았다. 시민단체들이 “가장 핵심적인 주주권은 빼버렸다”고 비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무진이 제안한 1안은 금융위원회의 지난해 6월 법령해석 중 ‘경영참여에 해당하지 않는 주주권’만을 포함하고 있다. 이사 추천권의 경우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 행사인데, 이 권한을 행사하려면 국민연금은 지분변동 신고의무 등 여러 법적 규제를 받아야 한다. 국민연금의 지분변동 사항이 수시로 공개될 경우 주식시장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 등을 고려해 이사 추천권 등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 행사는 뺐다는 게 정부의 논리다.

적당히 마사지된 도입안임에도 재계는 반발 중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 중 하나가 배당문제다. 주주권 행사 로드맵을 보면 당장 올해 하반기부터 국민연금은 저배당 기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배당 확대를 요구하고 나설 예정이다. 저배당 기업에 대한 배당문제 개선 요구는 국민연금이 현재도 하고 있는 일이지만 관리대상 저배당 기업도 더 늘리고, 대화도 더 자주하겠다는 뜻이다. 금융업계는 지난해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에 131조5000억원을 투자해 약 2조원가량의 배당수익을 거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배당문제는 기업의 수익을 주주에게 환원하는 문제 이외에도 기업의 지속 가능성과 미래 투자와도 연관되는 부분”이라며 “국민연금이 배당 요구에 적극적으로 나설 경우 다른 주주들도 합세할 가능성이 높아 경영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내부 분위기상 국민연금이 앞장서서 고배당을 요구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국민연금의 최고 의결기구는 기금운용위원회다. 과거 기금운용위에서 활동했던 한 전문가는 “국민연금은 기본적으로 기업이 안정적인 수익을 내야 배당금을 받아 재정을 확충할 수 있다”며 “기업에 무리를 주는 배당을 요구할 이유가 없고, 실제 기금운용위 분위기도 배당문제에 있어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라 기업들이 민감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연금이 그간 관리해온 이른바 ‘저배당 기업 블랙리스트’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2015년 저배당 기업 관리방침을 밝힌 국민연금이 3년간 블랙리스트에 올린 기업은 남양유업과 현대그린푸드 등 2곳뿐이다. 이마저도 올해 5월이 돼서야 지정됐다. 남양유업의 경우 2011년부터 수익이 나든 안 나든 주당 1000원 배당을 고집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개선을 요구했는데도 3년간 변화가 없었다는 게 국민연금이 블랙리스트에 올린 이유였다. 누가 봐도 배당성향에 문제가 있는 기업이 아닌 이상 국민연금이 섣불리 배당 개선요구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탁자책임전문위’ 독립성 확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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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드십코드 도입과 함께 기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있던 의결권전문위원회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로 확대개편된다. 수탁위는 국민연금 가입자 대표들이 추천한 민간 전문가 14명으로 구성돼 중요 주주권 행사활동을 승인, 점검하게 된다. 수탁위는 주주권 행사를 승인하는 것 이외에도 향후 주주권 행사 시 논란이 될 수 있는 정치·경제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적어도 의결권 행사와 관련해서는 수탁위가 최고의결기구인 셈이다.

재계 역시 수탁위 출범에 주목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면서 그간 사후공개를 원칙으로 했던 의결권 행사 방침을 사전공개하기로 바꾼 것이다. 의결권 행사 방침은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의 안건에 대해 찬반 의견을 밝히는 것을 뜻한다. 현재는 주총이 끝난 뒤 2주 내 사후공개가 원칙이다. 예컨대 A라는 기업이 3월 25일에 주총을 했다면 통상 4월 10일쯤을 전후해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어떤 안건에 찬반 의견을 냈는지가 공개된다. 의결권전문위원회에서 의결된 행사 방침의 경우 사전공개되기는 하지만 그간 사례가 많지는 않았다.

의결권 행사 방침이 사전공개되면 기업은 주총에 안건을 올리는 데 상당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현대모비스 분할 합병을 중심으로 그룹 구조개편을 추진했던 현대자동차그룹의 사례에서 이는 명확히 입증됐다. 현대차는 모비스를 분할한 뒤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한다는 개편안을 확정하고 올 3월 주총에 안건으로 냈다. 하지만 주총 개최 일주일을 앞두고 돌연 주총을 취소하고 개편안을 전면 재검토한다고 밝혔다. 당시 국민연금이 개편안에 의결권을 어떻게 행사할지가 최대 관건이었는데,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 국내외 주요 의결권 자문기관들이 잇달아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 방침을 공개하지도 않았던 시점이지만 상황이 어렵다고 본 현대차는 주총을 취소하기에 이른다.

4대그룹의 또 다른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주총 안건에 찬반 의견을 내게 되면 이해관계에 따라 해외 투자자나 소액주주들이 이에 호응해 나설 가능성이 있다”며 “국민연금이 마치 의결권 자문기구 역할을 하게 되므로 기업 입장에선 주총에 올릴 안건을 고르는 단계에서부터 많은 부담을 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7월 17일 열린 관련 공청회에서 재계 추천으로 나선 전삼현 숭실대 교수는 “비경영자의 경영참여를 논하려면 국내에서 경영권자가 충분히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며 “국내에 헤지펀드로부터 회사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수탁위가 성공하려면 수탁위 자체도 잘 꾸려야 하지만 이를 지원하고 보조할 기금운용본부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은 통상 주총이 열리기 2주 전에 주주들에게 주총 개최 및 안건 등을 통보한다. 수탁위가 주총 개최 전 안건을 살펴보고 의결권을 어떻게 행사할지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2주뿐이라는 뜻이다. 반면 2017년 기준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국내 기업은 276개에 달한다. 주요 기업들이 이른바 ‘슈퍼 주총데이’로 불리는 3월 하순에 주총을 집중 개최하는 점을 감안하면 2주 내 수많은 기업들의 주총 안건을 수탁위원들이 일일이 분석하고 파악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찬진 변호사는 “비상근인 수탁위 위원들은 결국 기금운용본부가 제시한 검토자료 등을 보고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며 “기금운용본부가 충분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밖에도 위원들이 꼭 주총 시기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주요 의결권 행사 대상 기업들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접해 의결권 행사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기금운용본부가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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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의 ESG 평가도 주목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으로 주목받는 것 중 하나가 바로 ESG 평가다. ESG는 환경·사회·구조를 뜻하는 영문 약자로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비재무적 위험 정도를 점수화하는 평가다. 국민연금은 자체 ESG 평가 기준으로 연 1~2회 평가를 실시한 뒤 특정 기업에 기업가치 훼손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사실관계 확인, 개선대책 등을 요구하는 비공개 주주활동부터 공개서한 발송, 경영진 면담 요구 등 공개 주주활동까지 나선다는 방침이다. 최근 총수 일가의 갑질문제로 도마에 오른 대한항공의 경우 국민연금이 공개 주주활동의 일환으로 공개서한을 보내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한 바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운용하는 ESG 평가 기준은 전체 52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환경 부문은 탄소배출량·대기오염물질 배출량 등 12개 항목, 사회 부문은 급여수준·조직문화·인권·협력업체 지원 여부 등 21개 항목, 지배구조는 이사회 활동·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 분리 여부 등 19개 항목이다. 기업이 일으키는 환경오염 문제나 노사문제, 총수 리스크 등도 모두 평가기준이 된다는 얘기다. 국민연금은 예컨대 ESG 평가에서 등급이 2등급 이상 떨어진 기업 등을 주주활동 대상으로 선별할 계획이다.

국민연금은 현재 ESG 평가를 가상펀드 운용에만 적용하고 있는데, 평가대상 기업이 161개에 달한다. 국내 주요 상장기업은 다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스튜어드십코드가 도입되면 이들 기업에 대한 실질적인 ESG 평가와 이 평가를 바탕으로 한 주주활동이 이뤄지게 되므로 기업 입장에서는 ESG 평가 결과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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