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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한국서 난민으로 산다는 건-콩고 출신 ‘마리’ 이야기]“자신을 한국인이라 말하는 두 아들이 ‘꿈’ 얘기 할 때면 착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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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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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콩고 미국대사관서 일하다가 ‘스파이’ 누명…체포 고비 넘기고 14년 전 한국행

난민인정 신청을 했지만 ‘증거 부족’ 이유로 거부…소송 끝 7년 전에 비로소 인정

건강보험과 일자리 생겨 좋지만,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엔 사람들이 안 앉으려 해

난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적어져 무국적자인 아이들에게 희망의 땅이 됐으면…


마리(41·가명)를 만나러 경기 안산시 단원구를 찾은 지난 6일,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에 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 아래 넓은 저수지엔 연잎들이 무성했다. 세월호 추모공원 건립 계획을 두고 찬반 논란이 첨예하게 일었던 안산시 화랑유원지다. 화랑유원지를 지나자 곧 안산시 글로벌다문화센터가 나왔다. 그곳에서 마리를 만났다.

마리는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 출신 난민이다. 한국에 온 지 14년이 됐고, 법정 소송 끝에 난민으로 인정받은 지는 7년이 됐다. 마리는 한국에서 보낸 세월의 절반은 난민신청자, 절반은 난민으로 살았다. 마리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리는 법원에서 떳떳하게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사코 사진 촬영을 거절했다. 우리사회에 들끓는 ‘난민혐오’ 정서 때문에 난민이라는 것이 알려질 경우 당할 불이익이 두려워서였다. ‘난민법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엔 역대 최대치인 71만명 넘는 국민이 참여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비율(1.51%, 2017년 기준)로 어렵사리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마리에게 난민은 안정적 삶의 발판이기보다는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주홍글씨’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마리의 팔목에서 노란색 팔찌가 달랑거렸다. ‘Remember 0416’이란 글자가 선명했다. 2년 전부터 그녀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팔찌를 끼고 다닌다고 했다. “단원고는 가까운 곳이에요. 그런 비극은 모든 사람에게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마리는 불행이 어느 날 벼락같이 찾아올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콩고에서 미국대사관 직원으로 일하던 스물일곱 살의 마리에게 벌어진 일처럼. 마리는 콩고의 수도에 있는 킨샤사 기독교 대학에서 마케팅과 경영을 전공한 뒤 주콩고 미국대사관에 취직했다. 마리는 미 대사관으로 오는 우편을 뜯어서 정리했다. 그중엔 콩고 정부가 보낸 문건도 많았다.

2004년 6월 어느 날, 군인들이 마리를 체포하기 위해 집을 찾아왔다. 정부에서 보낸 문건을 뜯어보는 마리를 스파이로 지목한 것이다. “그럼 조사를 받았나요?”라고 묻자 마리가 답했다. “콩고에서는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요. 체포해서 바로 죽이거나 합니다.” 당시 집에 없었던 마리는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친구 집에서 한 달을 숨어 지냈다. 같이 일하던 대사관 직원이 그녀에게 여권과 돈을 쥐여줬다. 한국 비자와 비행기표가 함께 있었다. 콩고엔 한국영사관이 있어 비자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망쳐 한국으로 왔다.

■ 선진국의 자원식민주의가 만든 전쟁

콩고는 오랜 내전 국가다. 조제프 카빌라 대통령은 17년째 장기집권을 하고 있으며, 인접국 르완다 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04년 콩고 동부 지역에 르완다군이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요. 콩고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유엔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수도 킨샤사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렸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2004년부터 시작된 전쟁은 콩고의 풍부한 자원 때문에 촉발됐다. 르완다는 2014년 단일국가로는 콜탄을 가장 많이 수출했다. 르완다에선 콜탄이 전혀 생산되지 않는데도 콜탄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콩고 동부의 키부 지역에서 콜탄을 밀반입했기 때문이다. 지구상 콜탄의 70~80%가량이 콩고의 키부에 매장돼 있는데, 오랜 내전으로 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 콩고의 인접국 르완다와 우간다는 자원을 확보하고 자국 이익을 강화하기 위해 콩고의 내전을 확대하고 있다. 콩고 내전엔 선진국들의 이해관계도 한몫한다. 김광수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교수는 “서구 국가들이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콩고의 민주주의와 정치적 안정을 원치 않는다”고 분석했다.

자원식민주의가 낳은 아프리카의 내전이란 역학관계 속에서 마리는 난민이 되어 한국에 불시착했다. 마리는 “스파이로 몰렸을 때 무척 놀랐다. 이런 일은 다른 사람에게만 벌어지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한국에 도착한 마리는 난민단체와 교회, 콩고 커뮤니티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곳에서 같은 콩고 출신 난민 남편을 만났다. 그해 10월,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마리는 “여성 혼자 난민으로 살기는 아주 어렵다. 차별과 핍박, 학대를 당하기 쉽다.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아들을 낳았다.

■ 신분 없는 아이들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아이들을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본국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도망쳐 온 난민으로서 콩고대사관에 출생등록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두 아이는 무국적자, ‘신분 없는 아이’가 됐다. 아이들이 아픈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아프면 약국에 갈 수밖에 없었다. 마리는 “다행히 아이들이 크게 아픈 일 없이 자랐다”고 말했다.

외국인이 많은 안산은 마리의 가족들을 배척하지 않고 품어주었다. 이주민들을 도와주는 원장을 만나 유치원에도 보낼 수 있었다. 마리는 “유치원엔 우리 말고 캄보디아, 중국, 러시아 등 다양한 이주민 아이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주민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냈다. 올해로 13살과 11살이 된 아이들은 자신들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일자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익힌 2006년에야 안산 시화공단에서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했다. 직업소개소에 가서 하루하루 새로운 일을 받았다. 박스 접기, 포장하기 등 주어지는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건 힘들었어요. 13개월 된 첫째를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놓고 늦게 집에 돌아왔죠.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해야 했어요.”

마리는 2004년 8월 난민 인정 신청을 했다. 2004년과 2006년 두 번의 조사 끝에 2009년 난민 인정이 거부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난민 심사 과정에선 엄격한 증거를 요구했지만, 하루아침에 스파이로 몰려 낯선 나라로 도망쳐 온 마리에게 그럴듯한 증거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리는 “급하게 도망갈 때 아무런 증거 없이 도망갔다. 증거를 어디서 얻어야 하나? 경찰에? 경찰에 가면 잡혀갈 것”이라며 “가족들이 나중에 e메일로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보내줬다”고 말했다. 마리는 법정 소송을 통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한국에 온 지 7년 만이었다. 그동안 마리와 가족들을 옭죄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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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민 인정 후에도 계속되는 차별

“난민 인정을 받기 전엔 건강보험이 없어서 혹시라도 아플까 계속 두려웠어요. 지금은… 일자리도 구할 수 있고,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마리가 난민으로 인정받은 후 좋아진 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들은 암담했다. “난민 인정을 받으면 모든 게 괜찮을지 알았어요.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난민이라고 하면 일자리도 구하기 어렵고, 편견을 갖고 무시하죠. 그래서 난민인 걸 밝히지 않아요.”

마리는 “예전엔 난민이라고 하면 ‘보트피플’로 대변되는 가난한 사람을 떠올렸다면, 이제는 ‘테러리스트’를 떠올린다”며 “나 자신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난민이라는 걸 밝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민인 걸 숨길 수는 있어도 피부색을 숨길 수는 없었다.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벽이 됐다.

마리의 남편은 2011년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5년이 지난 2016년에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마리는 “고용노동부에서 일자리를 알선해줬지만, 사장님이 아프리카 사람들은 안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 일을 전전하던 남편은 지금은 한 매트리스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엔 사람들이 앉으려 하지 않죠. 한 번은 지하철에서 나이 많은 분들이 나와 첫째 아들의 피부색에 대해서 말했어요. 첫째 아이가 말했죠. ‘할아버지, 피부색 이상하면 내일 바꿀 거예요?’ 아들이 한국어를 잘하자 그분들이 오히려 놀라더라고요.” 남편은 ‘고릴라’, 아들은 ‘괴물’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샤워를 많이 하면 피부색이 밝아질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마리는 아이들이 겪게 될 차별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두 아들은 ‘한국인’에 가깝다. 월드컵 때도 한국을 응원했다. 축구를 잘하는 첫째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인데 벌써 키가 170㎝다. 축구 국가대표가 되는 게 꿈이다. 의사도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꿈’이 아이들의 입에서 나올 때 마리는 착잡해진다.

“아이가 공부를 잘해 의대에 가더라도, 한국 의사로서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요? 난민이자 아프리카인인 그가 개원을 하면 한국 사람들이 그 병원에 갈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한국 사회엔 선이 그어져 있어요. 아이들도 우리가 다니는 공장에서 일하게 될 가능성이 높겠죠.” 마리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한국은 안전하고 좋은 나라다. 하지만 난민에게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난민도 과학자도, 의사도 될 수 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처럼 될 수도 있다. 피부색과 언어는 달라도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고,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얼마 전 둘째에게 키즈폰을 사주려다 “외국인은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왜 안돼요?”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마리는 한국 국적을 얻으려 돈을 모으고 있다. 국적을 신청하려면 6000만원의 자금이 있어야 자격이 주어지는데, 마리 가족에겐 꽤나 큰돈이다. 월세 60만원짜리 집에 살면서, 6000만원을 모으긴 힘든 상황이다.

■ 예멘 난민들, 포기하지 말길

마리에게 행복할 때가 언제냐고 물었다. “언제 행복하냐고요? 매일매일 행복해요. 저는 불만을 많이 얘기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불만이 있어도 조용히 하고, 행복하다고 말하죠.” 마리가 활짝 웃으며 말했는데, 그 웃음이 해맑다기보다는 달관한 것처럼 느껴졌다.

마리는 한국에서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고, 다른 난민들을 도우며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 이주민 지원단체에서 아티스트로 일하며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한다. 또한 다른 콩고 난민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고 있다.

마리에게 삶의 계획을 물었다. “아이들은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국적을 얻어 계속 살 수 있길 바랍니다. 나의 첫 번째 희망은 아이들이에요. 한국이 이주민들에 대해 조금 더 개방적이면 좋겠어요.” 콩고로 돌아가고 싶진 않냐고 묻자 마리는 “콩고가 민주화된다면 돌아가고 싶다. 아직 똑같은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하면 바로 죽인다. 1980년 한국의 광주처럼 아직도 폭압과 독재가 심하다”고 말했다. 마리 입에서 ‘광주’란 말이 나왔을 때, 손목에선 세월호 팔찌가 흔들거렸다. 마리는 한국 사회의 아픔을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 모른다.

대학에 가는 것이 특권인 나라 콩고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 대사관에서 일하던 엘리트 여성 마리는 한순간 난민이 됐다. 과거의 삶이 파괴된 것이 슬프지 않을까. 마리는 “나는 한 번도 난민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젊었고, 평범한 삶을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나에겐 아이들이 있고,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모두 잊어야 한다.” 27살 마리를 잊으려고 노력하는 41살의 마리가 말했다.

마리는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있는 500여명의 예멘 난민들을 향해 말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힘내세요.” 마리는 “난민들은 모두 다른 사연을 갖고 있어요. 반대하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안산 |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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