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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평화원정대] “떠나든가 죽어라”…총부리에 로힝야는 떠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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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16) 로힝야 난민캠프

모래 해변 ‘콕스바자르’ 뒤편엔…

미얀마 정부군 방화·학살 격화하며

살기 위해 1년새 72만명 급속 유입

다급히 들어선 27개 캠프로 대혼잡

다른 나라 캠프에선 볼 수 없는 풍경

난민이 원주민 수의 갑절 수준

양쪽 거주지 구분할 철조망도 못세워

경작지·우물 부족하고 물가도 급증

“그나마 군인들 있어 양쪽 평화 유지…

그래도, 쫓아내선 문제 해결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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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30돌 특별기획-평화원정대, 희망에서 널문까지> 인터렉티브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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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캠프라면 나름 익숙해질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여태 난민캠프를 세 곳이나 거쳐온 터였다. 이탈리아 로마의 바오바브 캠프(<한겨레> 6월6일치)는 북아프리카 난민들이 빈 터를 점거한 곳이라 예외적이었지만, 유엔기구들이 설립·운영하는 우간다 카리안동고의 남수단 난민캠프(5월15일치)와 요르단 아즈라크의 시리아 난민캠프(6월27일치)는 밖에서 보는 첫 인상부터 비슷했다. 높은 철조망 울타리와 삼엄하게 무장한 군인들. 집결→수용→격리라는 뚜렷한 목적이 충실하게 반영된 두 캠프의 풍경은 그만큼 단단하게 ‘고착’돼 있었다.

지난 10일 오전 콕스바자르. 방글라데시의 ‘관광 수도’로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모래 해변의 도시에 우기의 먹구름을 비집고 뙤약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풍경으로 보여주는 평화란 이런 게 아닐까. 그러나 인도양을 뒤로하고 차로 1시간30분만 달리면 평화로운 풍경은 어느덧 가뭇없다. 모두 27개에 이른다는 로힝야 난민캠프의 초입. 탄압과 죽음을 피해 미얀마에서 국경을 넘은 로힝야족 90만여명이 둥지를 틀고 있다는데, 콕스바자르 해변은 물론 다른 어느 난민캠프도 연상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무 데에도 속하지 않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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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일대 교통상황은 최악이었다. 얄미우리만치 한가운데만 살짝 포장된 길바닥은 넘쳐 흘러든 진흙으로 엉망이다. 캠프로 물자를 실어나르는 트럭과 ‘릭샤’라고 불리는 인력거, 방글라데시의 전동 인력거 ‘톰톰’이 마구 뒤얽혀 차는 가다 서기를 무한 반복한다.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논들 사이로 간혹 보이는 빈터에는 대나무 더미가 산을 이루고 있다. 난민들이 살 집을 지을 건축자재라고 했다. 어딜 가도 철조망은 없고, 방글라데시 원주민과 난민 거주지 사이의 구분도 뚜렷하지 않다. 집결→수용→격리라는 단계는 이곳 교통상황만큼 뒤얽혔다. 캠프는 다급하게 들어섰고, 여전히 증식 중이다.

미얀마 군대의 방화와 학살이 격화한 지난해 8월 하순 이후에만 72만명이 이곳으로 밀려왔다. 그들은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국경을 따라 흐르는 나프강을 넘어왔다. 상류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걸어서 건넜고, 하류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작은 배를 타고 건넜다. 올해 24살의 모하메드 토유브와 그의 가족, 일가친척 30명도 지난해 8월25일 배에 올랐다. 토유브는 전체 캠프 중간 지대 즈음인 자디무라 캠프에 1년 가까이 머물고 있다. 토유브는 “미얀마 군인들이 ‘너희들이 우리 군인과 경찰 19명을 죽였으니, 방글라데시로 가든가 아니면 여기서 죽어라’라고 했다. 그들은 사람이 있는 집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고 온 마을을 불태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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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든가 죽어라” 총부리에 모래알처럼 떠밀려…


시민권 없애놓고 박해 안한다고?
‘애초 라카인서 살았다 입증하라’
방글라데시-미얀마 정부 합의안
로힝야 “전제부터 모순” 귀환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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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을 믿는 로힝야족은 스스로를 1000년 이상 미얀마 서쪽 라카인주 북쪽 아라칸에서 살아온 소수민족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불교가 국교나 다름없는 미얀마 정부는 이들이 19세기 초반 방글라데시에서 국경을 넘어온 불법 이주자라고 규정한다. 미얀마 군부정권을 거치며 이들에 대한 공교육 및 공공 일자리 취업 기회가 제한된 데 이어 시민권까지 박탈당했다. 미얀마 정부군과 상대가 되지 않는 규모이지만, 일부 로힝야들은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을 결성해 저항했다. 이 와중에 지난해 8월 사건이 터지자 미얀마 정부군은 로힝야족을 상대로 대대적인 학살과 강제이주에 나섰다.

“다른 동네에 가려고 해도 미얀마 정부의 허가증을 받아야 했어요. 늦게 집에 돌아오면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가야 했고요. 무슨 일만 생기면 우릴 조사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불려 다녔죠.” 토유브가 챙 없는 무슬림 모자 ‘투피’를 고쳐 쓰며 인상을 찌푸렸다. 토유브는 유니세프와 지역 교육단체 ‘공동체개발센터’(CODEC)가 함께 운영하는 비공인 학교 ‘아동친화공간’(CFS·child friendly space)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한달에 4860타카(6만5000원)를 받는다. 그는 “여긴 남의 나라지만 오히려 자유와 평화를 느낀다. 이번에 로힝야들이 워낙 많이 죽어서 라카인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급속한 난민의 유입은 이미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난민촌 확장 과정에서 기존 주민들이 경작지로 쓰던 국유지가 캠프 터로 수용되는가 하면 마실 물을 확보하려고 관정을 과도하게 뚫다 보니 주민들이 쓰던 우물이 말라버리는 일도 숱하다. 원주민으로선 삶을 팍팍하게 하는 일들뿐이다. 쿠투팔롱 캠프 입구 쪽에서 태어나 40년째 살며 건설현장에서 목수와 조적공 일을 하는 압둘 카림도 요즘 난민들 때문에 걱정이 많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12일 낮 캠프 앞에서 만난 카림은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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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지난해 8월 이후 물가가 많이 오른 거예요. 30타카(400원) 하던 쌀 1㎏이 1년 만에 40타카(534원)로 올랐어요. 여기저기 사람들로 북적이고, 교통 혼잡도 극심해졌고요. 주민들은 농사짓던 정부 땅이 사라졌으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카림은 그나마 군인들이 캠프를 지키고 있어 이 정도 평화라도 유지된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난민의 평화가 아닌 원주민의 평화다. “원주민이 전체 난민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해, 군인들이 없어지면 되레 여기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지역 원주민은 35만여명에 불과하다. 두 남매의 아빠인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얼굴엔 불안감이 스며 있었다. 그런데도 카림은 난민들을 쫓아내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다. 문제가 확실히 해결돼 난민들이 웃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이곳 사람들이 얘기하는 ‘확실한 해결’이란 방글라데시 정부와 미얀마 정부가 이들 난민의 귀환 뒤 더는 박해를 받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도록 보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힝야족 개인이 애초 라카인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면 돌아갈 수 있다는 두 나라의 최근 합의안에 로힝야들은 “미얀마 정부가 시민권을 없애놓고 이제 와 라카인에서의 존재증명을 하라는 것은 모순”이라며 귀환을 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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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프강 건너, 불에 탄 고향 “돌아가고 싶지 않아”


가장 필요한것? 오늘 밥 지을 땔감
방글라 정부 ‘나무 채집 금지’에
난민-원주민 사이 극심한 갈등
그나마 ‘무슬림’ 동질감이 완화시켜

“바로 저기가 내가 살던 마을”
군대가 970명 살해한 툴라톨리 등
떠나온 마을 잿더미로 변한지 오래
“남의 나라지만, 이곳에서 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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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원주민과 난민의 갈등을 완화해주는 것 가운데 하나는 다 같이 알라를 믿는다는 종교적 동질감이다. 평화원정대가 쿠투팔롱 캠프 초입에서 잠깐 멈추자 무슬림 학교이자 예배당인 ‘마드라사’에서 30대의 무하마드 가르사르미아가 뛰어나와 일행을 불렀다. 가르사르미아는 22명의 로힝야 아이들, 18명의 현지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하루에 12시간씩 코란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는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5년까지 함께 먹고 자는데, 한달에 한번 정도 집에 간다”며 “라카인에서 공부하다 쫓겨난 로힝야 아이들도 이곳에서 공부를 마무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드라사와 모스크는 캠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난민들에게 당장 필요한 건 오늘 하루 밥을 지을 장작이다. 이곳에 나무 말고 다른 연료는 없다. 하지만 난민들이 이 지역 야산의 나무를 싹쓸이하는 바람에 원주민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자 방글라데시 정부는 나무 채집을 금지했다. 하킴파라 캠프에서 아이들 7명과 함께 사는 아메나 카툰(45)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묻자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돌아왔다. “요리할 때 쓸 장작이다. 현지인들이 나무를 자르지 못하게 해 옆집에서 불 때면 같이 음식을 하거나 쌀을 팔아 장작을 산다.”

미얀마 디골톨리라는 마을에서 쌀농사를 짓던 카툰은 지난해 8월 탈출하다 남편과 오빠, 아들 등 5명의 가족을 잃었다. 툴라톨리에 이르렀을 때 미얀마 군인들이 피난 행렬을 가로막고 남성 12명을 따로 떼어내더니 총을 쏘고 불태워 죽였다. 툴라톨리는 최근 1년여간 미얀마 정부군이 가장 끔찍한 살해를 저지른 곳으로 꼽힌다. 국내 인권단체인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아디·ADI)이 지난해 12월부터 툴라톨리 마을 생존자들을 면접한 결과, 전체 구성원 1599명 가운데 60.7%에 이르는 970명이 미얀마 정부군에 살해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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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저기예요. 저쪽이 제가 살던 마을이에요.”

평화원정대 차를 함께 타고 나프강 하류 쪽 테크나프 여객선 선착장에 내려 걷던 토엽이 강 건너편을 가리켰다. “지금은 학교 하나만 남고 다 불에 탔대요.” 2∼3㎞ 거리나 될까 하는 그곳 어딘지가 자신의 고향이라고 했다. 함께 선착장을 찾은 주바일(22)은 고향이 더 상류에 있다고 했다. 주바일은 토유브보다 나이는 두살 어리지만 이미 10년 전 강을 건너 난민캠프 경력은 훨씬 앞선다.

“미얀마에서 살 땐 군사정권이 시민권을 빼앗고 체류허가만 줬어요. 그다음엔 아이디 카드에 로힝야의 신분을 게스트라고 적더군요. 그 뒤엔 아이디 카드 자체를 없앴죠. 여기 와서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현지인이 아니니까요. 또래들 만나 큰 소리로 얘기하면 ‘너는 미얀마 사람이잖아. 조용히 해’라는 얘기를 듣곤 해요. 나는 왜 낮게 살아야 하는지 늘 슬프고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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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 인터뷰는 오래가지 못했다. 난민인지 현지인인지 알 수 없는 사람 10여명이 평화원정대와 토유브, 주바일을 둘러쌌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난민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말을 던진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두 난민은 당황한 기색이다. “우리에게 왜 로힝야 말과 방글라데시 말을 섞어서 쓰냐며 뭐라고 하는 거예요.”

취재차량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 사이에도 하류의 나프강은 인도양을 향해 조용히 흘렀다. 저녁 물때를 맞아 강물과 바닷물이 뒤섞이는 드넓은 기수역은 강이면서 동시에 바다거나,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그 무엇처럼 보였다. 차로 1시간30분만 가면 세계에서 가장 긴 모래해변이 펼쳐진다.

콕스바자르/전종휘 유덕관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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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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