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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동행르포]체온 42도...'대프리카' 폭염에 쓰러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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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 출동, 구급 출동.”
지난 17일 오후 5시 10분쯤, 대구소방본부상황실로부터 지령이 떨어졌다. 대구동부소방서 폭염(暴炎)구급대원들이 구급차량에 탑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5초. 신고가 들어온 곳은 대구 수성구 범어동 도로 위였다. 온도계는 34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범어동 도로 한복판에 대구 시민 장모(68)씨가 큰대(大)자로 쓰러져 있었다. 의식이 없었고,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목격자들은 “아저씨가 길을 걷다 갑자기 ‘픽’하고 쓰러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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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오후 5시 10분쯤 전재호 대구동부소방서 소방장(왼쪽)과 폭염구급대원들이 길가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시민을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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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구급대원들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한쪽에서 체온·맥박을 재면, 다른 한쪽에서는 들 것으로 장씨를 구급차로 옮기는 식이었다. 병원으로 이동하는 구급차 안에서 장씨의 체온을 내리는 응급처치가 이뤄졌다. 장씨의 의식이 돌아오자 전재호 소방장이 그제야 땀을 훔쳤다. “바깥이 펄펄 끓는데 (장씨가) 술까지 드셔서 몸에 열이 찼습니다. 큰 도로에서 쓰러진 것이 다행이랄까. 인적이 드문 곳에서 의식을 잃었다면 119 신고도 지연됐을 테고…. 큰일 날 뻔했습니다.”

대구는 아프리카처럼 덥다는 뜻에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로 불린다. 이날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는 초복(初伏). 대구 낮 기온은 36도까지 치솟았다. 디지털편집국 기동팀이 ‘대프리카’ 폭염구급대원들과 동행했다.

◇삼계탕 한 술 못 뜬 ‘대프리카’ 폭염구급대
‘대프리카’ 폭염구급대는 4.5리터(L)짜리 아이스박스를 매고 다닌다. 안을 열어보니 이온음료 두 캔, 알약 형태의 식염포도당, 식염수, 얼음조끼(아이스 팩 6개 부착) 등이 들어 있었다.

복날을 맞은 대구동부소방서 구내식당 점심 메뉴는 삼계탕이었다. “자, 몸보신하고 힘내자.” 대원들이 수저를 들자 상황실에서 “짹짹”하는 새소리가 났다. 폭염구급대를 호출하는 신호였다. 황지식 소방장이 구급차로 냅다 뛰었다. 삼계탕 국물이 바닥에 튀었다. 출동지는 대구국제공항. 시계는 오전 1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민을 구하고 구내식당으로 다시 돌아온 시각은 12시 30분. 삼계탕은 식어 있었다. 몇 술 뜨기도 전에 다시 “짹짹” 소리가 울렸다. “초복 삼계탕 먹기는 실패네요. 바깥이 지글지글 끓으니 어쩔 수 없죠. 폭염구급대니까 (정오가 지난) 지금부터 비상입니다.” 구급차에 탑승한 황 소방장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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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오전 폭염구급대원 이은식 대구동부소방서 소방교가 이온음료, 식염수, 얼음조끼가 든 아이스박스를 구급차에 싣고 있다. /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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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대프리카’, 멀쩡히 걷다가도 ‘픽’하고 혼절
최근 일주일간 동구소방서 관내에서만 온열환자가 하루 한 명꼴로 발생했다. 지난 12일 오후 5시쯤 길가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최모(52)씨는 상황이 특히 심각했다. 계란이 익을 정도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엎드려 기절한 그의 체온은 42도에 달했다. 걷다가 갑자기 ‘픽’하고 혼절했다고 한다.

이모(74)씨는 점심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쓰러진 경우다. 폭염구급대 응급처치로 정신을 되찾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분명히 식당에서 점심을 묵었는데, 나오는 길에 쓰러졌다고요? 내가?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이 하나도…” 당시 이씨 체온은 38.9도였다.

이날 대구 곳곳에서는 더위와의 사투가 벌어졌다. 농림축산부에 따르면 지난 11~18일 사이 폭염으로 대구·경북지역에서 10만여 마리의 가축이 폐사(斃死)했다. 대구 동구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박모(48)씨는 이날 눈을 뜨자마자, 축사에 대형 선풍기를 돌렸다. “안에 있는 사람도 이렇게 죽겠는데, 바깥에 있던 말이 무더위에 폐사할까 봐 그게 걱정이지예.”

한낮 시내는 한산한 편이었다. 차들은 다녔지만 보행자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날 ‘대프리카’ 대구의 불쾌지수는 ‘매우 높음’이었다. 모든 사람이 불쾌감을 느끼는 수준이라는 의미다. 실제 5분만 걸어도 ‘찜질방 불가마’ 수준으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바짓단이 허벅지에 달라붙었다. 짜증이 솟구쳤다.

대신 시민들은 카페로 ‘피신’했다. 남는 자리가 없었다. T카페 점원 이모(27)씨는 “지난주보다 손님이 두 배나 늘었다”고 전했다. 이날 대구·경북 전력사용량은 9037메가와트(㎿)로 올여름 들어 가장 높았다. 지난해 여름 최고치(8월 24일·8728㎿)를 이미 훌쩍 넘어선 수치다.

같은 날 살수차 399대가 대구 구석구석에 찬물을 뿌렸다. 대구 시내 63개 초·중·고교가 단축수업을 했다.

해가 떨어져도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에서 만난 시민들은 “여름철 ‘대프리카’에서 열대야(熱帶夜)는 일상이나 다름 없지예”라고 했다. 열대야는 밤사이 기온이 섭씨 25도 이상 이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밤 11시, 대구의 심야 기온은 31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류공원 야외음악당에는 이제야 ‘외출’한 시민이 많았다. “대구, 진짜로 덥지예. 더워서 사람이 살 곳은 못되예. 집에서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맞다가 답답해서 이제야 밖으로 나왔어예.” 주무 김모(55)씨가 한 손에 휴대용 선풍기를 쥔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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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오후 11시,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 야외음악당을 찾은 시민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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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구급대 “폭염보다 무서운 건 악성 민원 ‘단골손님’”
대구소방본부에 따르면 온열질환 감시 체계가 시작된 지난 5월 20일부터 이달 18일 오전 8시까지 대구에서 22명의 온열 환자가 발생했다. 열사병 환자와 실신 환자가 각각 3명 있었고, 일사병 등 열탈진 환자가 12명 발생했다.

‘대프리카’ 폭염구급대들은 더위가 익숙할까. 이들도 “우리도 사람인데 더운 걸 무슨 수로 참습니까”라고 했다. “너무 덥죠, 펄펄 끓는 쪽방에서 심장이 멎은 시민도 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죽어라 CPR(심폐소생술)을 합니다. 그렇게 3시간 만에 소방서로 돌아와도 아무도 ‘힘들다’ 말 못 합니다. 몸이야 힘들지만, 사람 살리는 일인데요.” 전재호 소방장이 말했다.

황지식 소방장은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체력 관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했다. “대프리카 더위에 지지 않으려면 체력관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소방관에게 체력관리는 업무와 마찬가지 아닌가요? 요즘엔 쉬는 날에도 자전거를 타거나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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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대구 중구 현대백화점 앞에 대구의 더위를 상징하는 ‘계란프라이’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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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보다 폭염구급대를 지치게 하는 것은 악성 민원인이다. 소방대원들은 이들을 ‘단골손님’이라 부른다. 택시 잡기 귀찮을 때 119에 전화 걸어 구급차 타고 귀가하는 ‘단골손님’도 있다.

“여름철 대구날씨 정말로 위험합니다. 정오만 넘어가면 긴장돼서 점심도 잘 안 넘어가요. 그런데 일주일에 2~3번씩 119구급차를 부르는 단골손님을 마주할 때가 힘들죠. 그 시간에 어느 거리에서 쓰러져 계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단골손님이 ‘대프리카’ 더위보다 더 무섭습니다.” 씩씩한 ‘대프리카’ 폭염구급대원의 약한 모습이었다.

[대구=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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