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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IF] '우주의 유령' 중성미자, 37억 광년 떨어진 블랙홀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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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22일 남극의 과학 연구시설인 '아이스큐브(IceCube)' 지하 2㎞ 아래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감지됐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중성미자(中性微子·neutrino)가 검출된 것이다. 중성미자는 우주 만물을 이루는 기본 입자이지만 질량이 거의 없고 전기도 띠지 않아서 세상 대부분의 물질을 그냥 통과한다. '우주의 유령'이라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스큐브 과학자들은 중성미자 포착 43초 후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경보를 보냈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세계 곳곳에서 천체망원경과 우주망원경을 총동원해 남극에서 포착한 중성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내는 연구가 진행됐다. 마침내 지난 13일 아이스큐브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12국 과학자 300여 명의 이름으로 "지난해 포착한 중성미자는 37억광년(光年, 1광년은 빛이 1년 가는 거리로 약 9조4600억km) 떨어진 블랙홀에서 나왔다"고 발표했다. 우주의 유령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손톱 면적에 매초 1000억개 지나가

중성미자는 우주가 탄생한 빅뱅 직후에도 나왔고, 태양의 핵융합이나 원전(原電)의 핵분열 반응에서도 나온다. 다른 물질과 반응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주변에 늘 있다. 매초 손톱만 한 면적에 1000억 개 정도의 중성미자가 지나간다.

조선비즈

/그래픽=양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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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큐브 과학자들은 남극 얼음 아래에 광센서 5160개를 심어놓고 중성미자가 아주 드물게 물을 이루는 수소·산소 원자핵이나 전자와 부딪히는 흔적을 찾아왔다. 일본에서는 폐광에 물을 채워놓고 중성미자를 검출하고 있다. 중성미자가 원자핵에 부딪히면 연못에 돌멩이를 던질 때 나타나는 파문(波紋)처럼 원형으로 빛의 충격파가 생긴다. 광센서는 이 신호를 감지한다.

지난해 포착된 중성미자는 에너지가 290조 전자볼트나 됐다. 김수봉 서울대 교수는 "태양이나 원전에서 나오는 중성미자에 비하면 수백만 배의 에너지"라며 "태양계 밖 먼 우주에서 엄청난 격변이 일어나야 그 정도 에너지를 갖고 지구까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과학자들은 아이스큐브의 경보를 받고 즉시 페르미 우주망원경으로 아이스큐브가 포착한 중성미자의 이동 경로 쪽을 뒤졌다. 그 결과, 중성미자는 북반구 하늘에서 보이는 오리온자리 왼쪽 어깨 쪽에서 시작해 지구를 관통해 남극까지 온 것으로 밝혀졌다. 오리온자리의 출발점에서는 한 달 전부터 태양의 1억 배 크기 블랙홀을 가진 'TXS 0506+056'이라는 블레이저(blazar)가 지구 방향으로 강력한 전자기파인 감마선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은하 중심의 블랙홀은 워낙 밀도가 높아 모든 물질을 빨아들이는데, 이 과정에서 수직 방향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낸다. 블레이저는 이때 분출되는 에너지의 방향이 우리 태양계를 향한 경우를 말한다. 결국 우주의 유령은 저 먼 은하의 블랙홀에서 나와 남극 얼음으로 직진해왔던 것이다. 2014년 말부터 2015년 초 사이 남극에서 검출된 중성미자 신호 13건 역시 TXS 0506+056에서 비롯됐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중성미자 천문학' 시대 신호탄 올려

과학자들은 스페인에 있는 지름 10.4m의 광학천체망원경으로 블레이저의 빛을 관측해 37억 광년 떨어져 있음을 알아냈다. 칠레에 있는 유럽남방천문대의 초거대망원경(VLT) 등 총 8개 관측 기관이 이번에 블레이저에서 나온 다양한 전파와 빛 신호를 포착했다. 김영덕 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실험연구단장은 "중성미자와 함께 감마선과 가시광선 등 다양한 전자기파를 동시에 관측했다는 점에서 중력파에 이은 새로운 '다중신호 천문학'의 성과"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도 두 별이 충돌할 때 나온 중력파와 함께 빛과 입자 등을 동시에 포착하는 성과를 올렸다. 지금껏 각기 따로 발전해오던 물리학과 천문학이 하나의 천체 사건을 연구하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이다.

중성미자 천문학은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크게 넓힐 수 있다. 김수봉 서울대 교수는 "지금까지 얼굴색만 보고 병을 진단하다가 X선 영상으로 인체 내부를 보게 된 것과 같은 사건"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지금까지는 별 표면에서 나오는 낮은 에너지만 관측했다. 과학자들은 별이 폭발할 때 중심부에 있는 훨씬 더 큰 에너지는 중성미자를 통해 우주로 방출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중성미자를 통해 별의 폭발도 과거와 달리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0년 넘은 고에너지 우주선(宇宙線)의 미스터리도 중성미자로 풀 수 있다. 별이 충돌하거나 초거대 블랙홀이 작동하면 엄청난 에너지의 입자들이 쏟아진다. 바로 우주선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도중에 자기장이나 다른 입자와 반응해 경로가 뒤틀린다. 반면 중성미자는 다른 물질과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아 이동 경로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아이스큐브 과학자들은 우주선과 함께 나온 고에너지 중성미자를 찾으면 우주선의 비밀도 풀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노벨상 0순위 연구 성과로 평가

중성미자는 노벨상의 보고(寶庫)이다. 1956년 미국 물리학자 프레더릭 라이너스는 원전에서 나온 중성미자를 처음으로 관측했다. 그는 199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앞서 1988년 미국 과학자 세 명이 입자가속기에서 나온 중성미자를 관측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다음은 일본의 시대이다.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 도쿄대 교수는 폐광에 물 4500t을 담은 중성미자 관측 시설 가미오칸데에서 초신성이 폭발할 때 나온 중성미자를 관측해 200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의 제자인 가지타 다카아키(梶田隆章) 교수는 가미오칸데의 업그레이판인 2세대 수퍼 가미오칸데에서 대기에서 발생한 중성미자가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종류가 바뀐 것을 관찰해 역시 201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고에너지 우주 중성미자가 블랙홀에서 나왔다는 이번 연구 성과 역시 노벨상 0순위로 꼽힌다. 국내에서는 카르스텐 로트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연구진이 아이스큐브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노벨상은 대표 과학자 3명만 받기 때문에 국내 연구자들은 명예만 얻을 수 있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y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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