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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혁명·예술·민주주의의 오늘을 묻다··· 칠레 산티아고의 ‘다크 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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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칠레 산티아고의 ‘다크 투어리즘’


ㆍ혁명을 노래하다 스러져간 이들, 시들지 않는 꽃으로 되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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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땅’이라 불리는 아타카마 사막, 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비경 파타고니아, 신비로운 모아이 석상이 있는 이스터섬… 환상적인 여행지가 많은 칠레는 남미 여행의 필수 코스지만 수도 산티아고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는 많지 않다. 앞서 소개한 여행지들로 이동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기착지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볼 게 없다’는 게 이유다.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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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민주적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쿠데타로 비극적 생을 마감한 그는 여전히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의 롤모델이다. 칠레의 ‘누에바 칸시온’(새 노래) 운동을 주도한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와 비올레타 파라는 어떤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 정도를 제외하면 칠레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세 사람이 바로 산티아고 공동묘지(Cementerio General)에 나란히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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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는 시내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에서 북쪽으로 20 블럭쯤 떨어져 있다. 걸어가면 30분, 택시를 타면 10분이 채 안 걸린다. 묘지 앞 평화의 광장엔 1863년 발생한 성당 화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탑이 들어서 있다. 1821년 문을 연 묘지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화려한 건물로 입구를 장식했다. 정문의 이름은 ‘평화의 문’이다. 입구에 설치된 지도엔 역대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가와 예술가 등 158명에 이르는 유명 인사들의 묘 위치가 자세히 표시돼 있다.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묘지를 찾은 것은 5월 말, 초겨울이었다. 아침부터 날이 흐렸고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입구를 지나 천천히 걸었다. 제일 처음 눈에 띈 것은 칠레 공산당 창설자인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의 묘였다. 언론인 출신인 그는 노동자·농민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사회주의에 투신한 많은 칠레 젊은이들이 자식에게 그의 이름 레카바렌을 물려줄 정도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돌로 소박하게 꾸민 무덤가엔 참배객들이 두고간 꽃과 화분이 여럿이었다. 묘비엔 “칠레 민중의 스승이자 길잡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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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십자가부터 갖가지 모양의 탑, 천사와 성인, 때로는 고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화려한 돌 조각들로 꾸민 묘지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개는 귀족과 부호 등 유력 가문의 가족묘였다. 인적도 드물고 호젓한 조각공원을 홀로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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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중앙쯤에 이르자 비로소 아옌데의 묘가 나왔다. 높이 10여m의 커다란 흰색 탑에 그의 이름과 생몰연도가 적혀 있다. 흰 국화와 붉은 장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탑은 4개의 기둥이 마주보고 선 모양이다. 탑 가운데에는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대통령궁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연설 내용이 적힌 석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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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노동자들이여, 나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권력을 찬탈한 반역자들이 강요한 이 슬프고 쓰라린 순간도 결국 이겨낼 것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알라메다 대로(산티아고를 남북으로 가르는 시내 중심가의 주요 도로)를 당당히 걸어갈 날이 곧 올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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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대통령에 당선된 아옌데는 구리를 비롯한 천연자원을 국유화하고 복지를 강화하는 등 노동자·서민 친화 정책을 폈다. 당시는 냉전이 한창이었다. 남미 대륙의 공산화를 걱정했던 미국은 정치·경제적 압박으로 아옌데 정부를 뿌리부터 흔들었고, 쿠데타를 물밑 지원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해마다 수백만달러의 공작금을 뿌리며 반대파를 키웠다. 결국 군 총사령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위시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17년간 칠레의 민주주의는 억압됐다. 군부독재 하에서 3000명이 넘는 사람이 학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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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그렇게 숨진 이들 가운데 칠레의 국민가수 빅토르 하라도 포함돼 있다. 그가 노래한 누에바 칸시온은 토착음악의 전통을 살려 민중의 현실을 보듬었다. 음악으로 사회정의와 혁명을 추구한 셈이다. 하라는 “나의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 말하곤 했다. 쿠데타 직후 칠레경기장에 끌려가 살해당한 하라의 손은 더이상 기타 치고 노래 부를 수 없도록 짓이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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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북쪽 끝에 있는 하라의 묘를 찾으러 가는 동안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널찍하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묘는 점점 사라지고 싸구려 철제 십자가가 다닥다닥 붙은 초라한 묘들이 눈에 들어왔다. 북으로 갈수록 묘가 차지한 땅은 쪼그라들었고 십자가는 녹슬기 시작했다. 심각한 빈부 격차의 현실이 공동묘지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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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좁은 땅조차 차지하지 못하고 한쪽 벽에 움푹 구멍을 판 벽감(壁龕) 안에 하라의 묘가 있었다. 3m 높이로 길게 이어진 벽감엔 쉽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글씨로 쓴 수많은 망자의 이름과 사연이 빼곡했다.

하라의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데 묘지 인부가 말을 건네왔다. 하라의 딸들이 최근에 묘를 이장했다며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말투와 걸음걸이에서 이미 여러 관광객을 안내해 본 티가 났다. “하라를 좋아하냐”고 묻자 그는 “칠레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좋아한다”고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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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자리에서 100여m쯤 떨어진 곳에 새로 단장한 하라의 묘는 마치 꽃상여처럼 화려했다. 케추아족, 마푸체족 같은 칠레 원주민부터 각종 인권단체와 저항조직 등 그가 옹호하고 대변하려 했던 수많은 이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상징물을 가지고 와 묘를 장식한 덕이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옆엔 낡은 기타 한 대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모습을 묘지 인부는 흐뭇하고 자랑스런 표정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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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파라는 묘지 동쪽 출구 쪽에 잠들어 있었다. 바로 전에도 누가 다녀간 듯 생화가 무덤을 가득 덮고 있었다. 무덤 앞은 마치 작은 무대처럼 바닥에 예쁜 모자이크 조각이 장식돼 있었다. 그가 작곡하고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불러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노래 ‘삶에 감사해’(Gracias A La Vida)의 멜로디가 절로 튀어나왔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는 그 노랫말이 유난히 사무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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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으면 어떻게 될까…

아옌데의 흔적이 깊이 새겨진 곳이 산티아고 시내에도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 연대 미술관(Museo de la Solidaridad Salvador Allende)이다. 아옌데는 집권 후 전 세계 예술가들에 편지를 보내 칠레 민중을 위한 미술관을 만들겠다며 작품 기증을 요청했고, 실제로 600여점의 작품이 답지했다. 후안 미로나 로베르토 마타 같은 유명 작가들도 작품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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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한 ‘연대 미술관’은 쿠데타로 2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추방당한 미술관 관계자들은 유럽 등 망명지에서 ‘저항의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해외 전시를 지속했다. 1990년 독재가 종식되고 다시 미술관을 열면서 지금의 이름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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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산티아고 남서쪽의 고즈넉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1925년 벨기에 사업가의 저택으로 처음 지어졌다는 건물은 고풍스러운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1층에선 군부독재 시절 훼손되거나 사라졌다가 되찾은 작품들이 ‘데뷔’라는 제목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2층은 팔레스타인 작가들이 기획한 인권 관련 전시가 한창이었다. 큐레이터 마리아 빌체스는 “미술관을 처음 만든 아옌데의 철학을 이어받아 사회정의와 국제적 연대에 관련된 예술품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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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인권 박물관은 산티아고의 다크 투어리즘(전쟁·학살이나 재난·재해 등 인류사의 비극이 일어난 곳을 둘러보고 교훈을 얻는 여행)을 완성하기에 맞춤한 곳이다. 좌파 정부인 미첼 바첼렛 대통령 시절에 개관한 이 박물관(Museo de la Memoria y Los Derechos Humanos)은 피노체트 독재 시기에 벌어진 참혹한 인권 탄압을 낱낱이 기록해 고발하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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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 들어서면 세계 지도 모양으로 나열된 사진 속에 각국의 인권 유린 현장이 담겨 있다. 아래쪽 표지판엔 국가 폭력과 관련된 각 나라의 과거사위원회 현황과 활동 내용도 소개돼 있다. 물론 한국도 포함돼 있다. 경찰과 시위대가 맞서는 오래된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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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선 쿠데타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었다. 화면에 눈을 고정한 학생들의 수군거림과 탄식이 간간이 이어졌다. 기다란 복도의 한쪽 면엔 쿠데타 이후의 사회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언론 보도 내용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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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자들 정화하는 거대한 작전” “군대가 조국이 부여한 임무를 맡았다”… 군부가 쿠데타를 정당화한 발표를 그대로 받아쓴 보도들이 대부분이었다. “전국에 통금·계엄령” “통금 위반으로 1237명 체포” 등의 헤드라인은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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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한쪽 벽은 2층부터 3층까지 희생자들의 흑백 사진이 가득 걸려 있는데 고개를 아무리 쳐들어도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컸다. 당시 벌어진 폭력과 야만의 깊이가 물리적으로 전해왔다. 박물관 입구엔 커다란 하얀 벽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위에는 “내가 잊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은 저마다 그 아래 글씨를 끄적였다. 이곳이 왜 학생들은 물론 전 세계의 관광객들에게도 민주주의의 산교육 장소로 소개되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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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쿠데타, 군부독재, 민주화…. 지구 반대편의 나라 칠레지만, 한국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역사의 궤적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 느리지만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진 역사적 필연의 흔적들이 산티아고의 묘지들과 박물관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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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칠레)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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