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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예멘 킥복서 발 묶인 ‘코리안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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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지난 5월 제주에 온 예멘 난민 아흐마드…

예멘 국가대표시절 ‘2013년 인천 실내 무도 아시안게임’ 출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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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투, 원투.”

7월12일 오후 제주시 고마로에 있는 킥복싱 체육관. 코치의 기합 소리와 미트(장갑처럼 손에 끼는 훈련용 패드)를 때리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지루한 장맛비에 이은 폭염으로 주변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듯한 날씨였지만 예멘 킥복싱 국가대표 출신 아흐마드 아스카르(28)의 눈빛만은 또렷했다.

“얼굴 진짜 작다. 때릴 곳도 없겠어.” “같은 체중의 다른 선수라면 (키가) 아흐마드 가슴까지밖에 안 될 거야.”

연습을 멈추고 아흐마드를 유심히 관찰하던 사람들은 찬사를 쏟아냈다. 키 175㎝, 몸무게 53㎏의 아흐마드는 길고 가볍다. 그의 부드러운 발차기가 허공을 갈랐다.​ 주먹은 경쾌한 리듬으로 시간을 쪼갰다. 1초에 네댓 번은 내지르는 듯 보였다.

“한국 사람은 가드를 올려도 팔이 짧아서 옆구리가 비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흐마드는 워낙 팔이 길어서 얼굴부터 옆구리까지 다 가려진다.” 체육관 관계자가 기자에게 귀띔했다. 아흐마드는 빈틈없고 단단해 보였다. 수비할 때는 마치 수축한 것처럼 작아졌다가 공격할 때는 커졌다.

잡힐지 말지 모르는 경기

제주도 킥복싱협회는 8월께 아흐마드를 위한 시합을 고민 중이다. 아흐마드는 잡힐지 말지 모를 경기를 위해 몸을 만들고 있다. 날마다 오전엔 인근 축구장을 50바퀴 달리고, 오후 5~10시까지 체육관에서 훈련한다.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는다. 운동을 하면서 그는 예멘에 남은 가족과 연인을 생각한다. 세계 챔피언을 꿈꾸는 아흐마드는 운동하지 않을 때도 숙소에서 격투기 프로그램을 보며 이미지 훈련을 한다. 그는 간절하다. 아흐마드가 한국 사회에 ‘킥복싱 선수 아흐마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언론 인터뷰를 결정한 배경이다. 아흐마드는 예멘에 남은 가족이 여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몸져누운 아버지뿐이어서 가족이 후티 반군에 해코지를 당할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무슬림인 아흐마드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하루 다섯 번 기도하고, 모든 식사가 끝나면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신은 그에게 쭉 뻗은 팔과 다리, 강한 체력 등 킥복싱 선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선물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국가는 허락하지 않았다.

예멘에서는 2014년 9월 시작된 내전이 4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만 명이 넘는다. 전쟁을 피해 세계 각국을 떠도는 예멘인은 28만 명을 넘어섰고, 예멘에서 떠도는 피란민도 200만 명에 이른다. 아무리 재능을 타고나고 열심히 노력해도 평화로운 국가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아흐마드가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이 있는 예멘을 떠나야 했던 이유다.

아흐마드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나 예멘 하자주에서 자란 아흐마드는 다섯 살 때 태권도를 배우며 처음 격투기에 입문했다. 외국에 나갔다 오는 이웃들이 태권도를 배워와 아흐마드에게 가르쳐줬다. 그는 발차기에 소질이 있었지만 하자주에는 체계적으로 태권도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태권도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포기해야 했다.

“운동에 소질이 있구나, 킥복싱을 한번 배워보지 않을래?”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만난 에브라힘 코치는 아흐마드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킥복싱 특유의 역동성과 강렬함에 매료된 그는 에브라힘 코치의 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훈련했다. 타고난 소질에 노력이 더해지자 아흐마드의 킥복싱 실력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시작한 지 8년 만인 2013년에는 예멘 국가대표 자격으로 ‘인천 실내 무도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아흐마드는 이 대회에서 몽골 선수에게 판정패했지만 특유의 민첩함과 파괴력이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요르단 킥복싱협회 관계자들은 그에게 요르단에서 훈련할 것을 제안했다. 모든 체류비와 훈련비를 지원받았다. 그는 이듬해인 2014년 5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랍 킥복싱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그가 선전하는 모습은 예멘 언론에 보도됐고, 유명 인사가 됐다. 그는 기뻐했지만 영광의 순간 뒤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 2014년 가을 조국 예멘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친구들은 ‘관’에 담겨 돌아왔다

2014년 말, 그가 다른 지역에서 온 친구와 집 옥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후티 반군이 들이닥쳐 이들을 체포했다. 아흐마드 집 주변에 있는 후티 군대의 위치 정보를 유출했다는 이유였다. 후티 반군은 아흐마드를 구금한 뒤 휴대전화를 압수해 조사했다. 크게 놀란 아버지가 이틀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울며 요청한 끝에 아흐마드는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하자에 머물 수 없어 혼자 수도인 사나로 떠났다.

운동 능력이 출중했던 그는 사나에서도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지역 스포츠센터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가르쳤고, 킥복싱 코치로도 일했다. 이후 사립학교 체육 교사로 취직해 교사가 됐다. 하지만 아흐마드의 성취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 앞에 매번 빛을 잃었다. 2015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 접경지역을 지나던 형이 전투기가 떨어트린 폭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전쟁이 길어지자 후티 반군이 지배하는 정부는 2016년부터 아흐마드에게 월급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면 더 이상 돈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형의 죽음으로 집에서 하나뿐인 아들이 됐다. 예멘에서는 아들이 한 명뿐이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후티 반군은 막무가내였다. 아흐마드가 독자인 줄 알면서도 무작정 군대로 내몰았다.

사각 링 위에서의 싸움은 두렵지 않았지만 죽음은 두려웠다. 전쟁에 나간 친구들은 모두 관에 담겨 돌아왔다. 지역축구 팀 선수이자 절친한 친구인 아누아르도 후티 반군에 끌려가 전쟁터에 갔다가 지난 6월 말 숨을 거뒀다. 아흐마드는 페이스북을 보고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됐다.

지난해에는 타이의 한 체육협회가 타이에서 훈련할 것을 제안했지만 후티 반군과 예멘 정부는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직업도 가질 수 없고 운동도 할 수 없었던 아흐마드는 탈출을 결심했다. 평화로운 곳에서 안전하게 살고 싶었고, 킥복싱이 하고 싶었다.

아흐마드는 지난 3월 예멘을 떠나 무에타이 선수 친구가 있는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그는 킥복싱 시합에 나섰고 두 번의 시합에서 모두 이겼다. 대전료로 각각 200달러와 1천달러를 받았지만, 두 번째 경기에서 발목을 다쳐 세 번째 경기에는 나갈 수 없게 됐다. 그사이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8년 이후 들어온 예멘인은 3개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선언했다. 예멘인 입국자 수가 빠른 속도로 늘어난 탓이다.

예멘, 말레이시아 그리고 코리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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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아흐마드는 페이스북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킥복싱 선수들을 찾아 연락했다. 서울에서 킥복싱 선수로 활동하는 미국인 선수 브레넌과 연락이 닿았다. 그의 선수 경력을 확인한 브레넌은 서울로 오기만 하면 묵을 곳을 제공하고 훈련도 돕겠다고 했다. 마침 6월20일 경기도 오산에서 코리아 킥복싱 챔피언십이 열린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제주도를 거쳐 서울로 간 뒤 대회에 참가할 계획을 세웠다.

5월2일, 제주공항에는 무사증입국제도로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예멘인 수십 명이 몰렸다. 그런데 출입국관리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흐마드 앞에 줄 섰던 몇 명은 심사대를 통과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아흐마드는 밀려드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지난 인천아시안게임 방문 때 받았던 비자를 보여줬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은 그를 통과시켜줬다. 그제야 아흐마드는 편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예멘을 떠난 뒤 가장 긴장된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맘때 제주도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더위를 피해 휴가를 즐기려고 찾는 피서지다. 전쟁을 피하고 운동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온 아흐마드에게는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피란지였다. 급한 불은 껐지만 아흐마드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무사증입국제도로 제주도에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하는 예멘인이 늘자 한국 정부는 4월30일 이후 입국한 예멘인 486명이 제주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출도제한조치’를 내린 상태였다.

아흐마드는 막막했다. 제주도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킥복싱 대회에도 나갈 수 없게 됐다. 설상가상 독감 증상까지 보였다. 말레이시아에서 함께 넘어온 친구들은 이유를 모른 채 아흐마드처럼 시름시름 앓았다. 초여름이었지만 한기에 떨었고 기침을 달고 살았다. 시간은 흘렀고, 말레이시아에서 번 돈은 떨어져갔다. 아흐마드는 6월18일 제주 출입국청에서 주최하는 요식업 일자리 주선 행사에 참석했다. 6월14일에는 어업 관련 업주들과 연결해준다고 했지만 물을 무서워하는 그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흐마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한 돼지고기 식당 주인아주머니 눈에 들어 취직이 됐다. 불판을 나르고, 서빙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익숙지 않아 실수가 잇따랐다.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 문제도 심각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밤 11시까지 13시간씩 쉬지 않고 일했지만 주인아주머니는 아흐마드가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내쳤다. 일주일 노동으로 얻은 것은 37만원과 불판에 데어 팔 곳곳에 생긴 화상 자국이었다.

대한킥복싱협회가 지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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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에서 쫓겨난 뒤 제주 시내 한 숙소에 예멘 친구들과 묵고 있었지만 7월2일 모든 돈이 떨어졌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먹을 것도, 묵을 곳도 없었다. 숙소 주인은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한국 경찰은 예멘인들에게 무서운 존재다. 작은 실수로라도 경찰서에 가게 되면 난민 심사 과정에서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

짐을 들고 나왔는데 갈 곳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브레넌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브레넌은 대한킥복싱협회 공선택 사무총장에게 연락했다. 공 총장은 제주도킥복싱협회에 전화했다. 허창희 관장은 아흐마드를 체육관으로 불렀다. 허 관장은 사비를 털어 체육관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아줬다. 킥복싱에 대한 아흐마드의 열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에 매일 체육관에 나와 훈련하도록 했다. 아흐마드를 위해서 자체 대회를 여는 것을 생각했지만 예멘 난민을 바라보는 제주도민의 여론이 곱지만은 않아 고심 중이다. 일단 언어를 배우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해 다른 선수들과 같이 아흐마드의 한글 공부를 돕고 있다.

함께 운동한 지 2주 만에 스파링 파트너이자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김아무개씨는 예멘 난민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주변 친구들이 예멘 사람들이 싫다고 이야기하는 걸 많이 들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다른 운동하는 친구들과 같았다. 오히려 더 착하고 인간적이어서 금방 친해졌다. 사람들이 예멘 친구들을 나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종, 종교, 정치, 성별 등을 이유로 국가나 사람에 대해 행해지는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허용하지 않는다.” 공 총장은 <한겨레21> 전화 인터뷰에서 올림픽 헌장을 언급했다. 그는 “현재 아시아킥복싱연맹 나세르 나시리 회장도 이란 출신 난민이다. 이라크전쟁 때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번에 아흐마드 일로 통화를 했는데 ‘우리가 꼭 챙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운동선수가 운동하고 싶어 하면 돕는 게 스포츠 정신이다”라고 말했다. 대한킥복싱협회는 난민 심사가 끝날 때까지 아흐마드를 지원할 방침이다. 9월 열리는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티셔츠를 대량 제작해 판매한 수익금으로 아흐마드를 지원하는 등 모금 활동도 계획 중이다.

“킥복싱은 나의 생명이다”

아흐마드는 숙식비를 벌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도움을 받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일과 운동이다. 킥복싱협회 관계자는 안타까워했다. 최근 킥복싱의 인기가 높아져 전국적에 1500개 넘는 체육관이 생긴데다 아흐마드 정도 실력이면 서로 모셔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흐마드 이야기가 협회에 퍼지면서 몇몇 도장에서 데려가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아흐마드가 제주도에서 나가지 못한다고 했더니 아쉬워했다. 서울에서 코치로 일하겠다고 하면 월 300만원을 주겠다는 체육관이 줄을 설 것이다”라고 했다.

아흐마드가 예멘을 떠난 지도 어느덧 넉 달이 흘렀다. 전쟁이 없는 곳으로 왔고 운동도 할 수 있게 됐지만, 가족과 조국을 떠나 혼자 견디는 삶은 외롭다. 아흐마드는 운동을 하면서도 계속 가족과 예멘의 전쟁에 대해 생각한다. 며칠 전에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다 포기하고 예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어머니는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예멘을 떠나 한국까지 가서 하고 싶었던 운동을 하고 있다. 이미 충분히 대단한 일을 했다. 절대 돌아오지 말고 꿈을 좇아가야 한다”고 다독였다. 사실 예멘의 내전 상황이 악화돼 되돌아갈 방법도 없다. 돌아간다면 예멘에 들어가기 전에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아흐마드가 말했다. “전쟁은 타인을 공격하지만 킥복싱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킥복싱은 나의 생명이다. 꼭 한국에서 유명한 킥복싱 선수가 되고, 전쟁이 끝난 뒤 예멘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연인과 결혼하는 게 꿈이다.”

제주=이재호 기자 ph@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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